GENESIS23 | 창세기 23장 (천국 확정=죽는 순간)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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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23 | 창세기 23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창세기 23장 (천국 확정=죽는 순간)

1.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0절까지)

1절입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원래는 백 세, 이십 세, 칠 세 이렇게 각각 따로 얘기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라의 나이를 말했냐하면 우리는 각각 사람마다 살아가야 할 삶의 여정의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바에 의해서 사라가 살았다는 얘기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분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분량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고 우리가 천국 만이 아니라 그 살아갈 삶의 여정 마저도 하나님의 계획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는 내용에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로 부연 설명까지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삶을 귀히 보십니다.

2절입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기럇아르바는 또 다른 지명 이름이고 헤브론이 원래 이름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오래 살다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그 곳을 빠져나와 그랄 밑에 잠시 거류하다가 브엘세바에 오랫동안 머뭅니다. 머물다가 드디어 3년전에 이삭을 바치는 순종을 숫양을 통해서 감행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언제 브엘세바에서 올라온 지는 모르겠어요. 이삭의 출생부터는 브엘세바에 있었고, 지금 사라가 백이십칠 세니까 적어도 35 년정도는 살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올라왔을 것입니다. 헤브론에. 왜 왔을까요? 아마 사라가 헤브론 땅을 그리워하는 향수 일 확률이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로 나중에 또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헤브론에 늘 머물다가 아브라함 구십구 세 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하고 그랄에 잠시 거류하다 브엘세바에 주로 머물다가 사라가 임종이 가까워 옴을 인지하고 잠시 올라갔다가 다시 브엘세바로 내려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여기서 ‘들어가서’는 오번역이고 그냥 ‘가다’에요. 죽었는데 아브라함이 ‘왔다’. 뭐에요?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을 때 곁에 있지 않았다는 의미 입니다. 그러니까 사라가 그리워하던 헤브론에 와서 마침내 임종 할 때에 아브라함이 그 곁에 없을 때 죽고 나중에 아브라함이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원래 용어는 헷 아들들 입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살 땐 아모리 족속이 이 사해 서쪽 지방에 항상 살았는 데 지금은 헷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헷 족속의 침략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모리 족속에 대한 헷 아들들의 공격이에요. 그러니까 가나안에 아모리 족속도 있고 헷 족속도 있는데 헷 족속이 아모리 족속을 공격하고 그 지역을 점령한 것입니다.

4절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여기서 ‘거류하다’는 나는 이방인이고 체류하는 자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이 오래 머물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5절입니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물론 여기서도 헷의 자손들(아들들)입니다.

6절입니다. ‘내 주여’ ‘주여’는 Sir 이런 존칭어 입니다.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이것도 약간 오번역 입니다. 그냥 이런 말입니다. ‘당신은 강력한 왕자입니다.’ 우리가 ‘왕’이란 말은 함부로 못 쓰죠. 왜? 통치를 하는 사람이 왕이고 왕 밑에 있는 우두머리 격의 사람을 이렇게 표현한 것 입니다.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원래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헷 사람들이 볼 때 아브라함이 굉장히 강력한 사람이니까 강력한 왕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아브라함과 헷 자손 간에 평화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어디에서 누구와 살던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것 입니다. 예전에 이 땅에 아모리 족속과 살 때도 아모리 족속이 아브라함을 도와 소돔과 고모라의 다섯 왕들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헷 족속과도 우호적인 관계, 동맹 가운데 서로가 땅을 내줄 수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몸을 굽혔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항상 예의가 발랐던 것입니다. 지금은 치면 교양이 있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해야 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행했음을 의미합니다.

8절입니다.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여기서 ‘소할’이라는 사람이 나오죠. 아브라함이 땅을 지명하는데,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원하는 땅 아무 곳이나 가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이 소할의 아들 에브론을 지명하여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원래 원어는 밭의 변두리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에브론이 땅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밭이 Field(밭)가 있는데 Field 그 끝 쪽에 약간 올라간 동산이 있고 거기에 굴이 있는데 그 굴 이름이 막벨라 굴일 확률이 큽니다.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지금 헷 족속은 어디든 아브라함이 원하면 그냥 주겠다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무슨 일이든 그 대가를 지불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0절입니다.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더니’ 헷의 아들들 가운데 앉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원래 원어에서보면 에브론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헷 족속이라는 표현 가운데 등장합니다. 나머지는 다 헷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돼요. 그러니까 헷이 부족장이고 헷의 아들들이 있고, 헷의 자손들이 있어요. 그러므로 에브론은 헷의 직계는 아닙니다. 왜? 에브론에 대해서만 헷 족속이라고 표현 돼있어요. 다시 말하면 먼 친척 뻘 이라고 생각합니다. 먼 친척이기 때문에 에브론만 헷 족속이라고 표현 돼있는 것이죠. 그런데 에브론이 성문에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성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즉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의 군사적인 관계를 상징해요. 이 성은 어떤 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 변방에 널리 둘러친 성이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마을을 중심으로 작게 지어진 성입니다. 이 작은 성에서는 낮에는 성 밖에 나가서 노동을 하고 목축을 하고 밤이 되면 들어옵니다. 이런 성입니다.

11절입니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지금 에브론이 대가를 받지 않고자 합니다. 그냥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론이 밭과 밭의 변두리에 있는 동산 그리고 그 동산 안에 있는 굴까지 모두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브론, 헷 족속의 아브라함에 대한 신뢰감을 나타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계명대로 살았냐는 것을 잘 나타내는 장면입니다.

12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여전히 교양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그 땅의 백성이 듣는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다시 또 값을 주겠다고 청하는 것입니다. 서로 계속 양보하는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이정도로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증거를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평가에요.

14절입니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5절입니다.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자! 드디어 땅 값을 말해줍니다. 너무 주겠다고 하니깐 결국 값을 말해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드라크마나 데나리온이 하루 품삭이었죠. 지금의 15 만원에 해당되죠. 4 드라크마가 1 세겔입니다. 그래서 1 세겔이 15 만원 곱하기 4 하면 60 만원이죠. 은이 세겔의 일반적인 재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400세겔이면 2 천4 백 만원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1800 년 전이므로 그 당시엔 더 비쌌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1800 년 동안 가치가 더 늘어났겠죠. 세겔은 변하질 않습니다. 무게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 열 배까지는 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서 2 천 4 백만에서 2 억 4 천 정도의 금액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낮게 평가를 해도 2 천 4 백 만원인데 요즘 세상에 그걸 누가 주겠습니까? 그걸 주겠다고 하니 아브라함의 위치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많이 치면 2 억 4 천입니다. 대단합니다. 주기 힘들어요. 이걸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또 안 줘도 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지금 저 같으면 감사하다고 하고 장사한 다음에 나중에 준다고 할 것 같은데, 아브라함은 그게 다른 것 같아요. 지금 상인이 통용하는, 즉 통화 입니다. 세겔이 있는데 이게 상인이 통용하는 통화로 정식 돈인 것이죠. 상인에게 통용되는 돈을 달아서 바로 주는 것입니다. 아직 장사도 안 치뤘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7 일간 장례를 치룹니다. 언제가 제일 중요하냐하면 죽은 날입니다. 이 시신이 죽은 날 항상 입관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3 일 뒤에 입관하죠. 입관이 뭐냐하면 시신을 땅에 묻거나 봉인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은 죽은 날 바로 입관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날인 거에요. 무조건 돌아가신 날 기별을 받으면 장사하기 위해 가야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행사가 장례식입니다. 2 번이 결혼식이에요. 장례가 결혼보다 가장 강력한 예식이에요. 물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따라한 것이지만 아브라함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겠죠. 즉 완전한 정직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정직, 깨끗함을 얘기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몸에 배인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마므레 앞’ 자! 여기서 마므레는 아모리 족속 족장이었어요. 원래 아브라함이 처음에 가나안 들어왔을 때 세겜 옆에 살았다가 며칠 있다가 내려오죠. 내려와서 아브라함이 그 당시 마므레에 거합니다. 마므레는 아모리 족속의 족장이었어요. 그래서 ‘마므레 앞’ 그러니까 마므레가 있던 지역, 마므레 평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아모리 족속들을 헷 족속이 몰아내고 그 땅에 성을 짓고 성 밖에서 경작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성 문에 들어왔다는 의미는 이것이 작은 성이고 성 안에서도 경작을 했으면 성 안에 있던 땅이니까 더 비쌌겠죠. 성 밖에 땅은 다른 족속과 싸우다 보면 잃을 수도 있는데 성 안은 안전하죠.

18절입니다.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확정된 것입니다. 계약적인 방법인데, 증인을 통한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는 도장을 찍거나 등기를 등록하는데 이 당시에는 사람들이 증인을 보는 것으로써 등기를 보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계약서도 없고 땅의 소유권과 계약을 가릴 방법이 없죠. 그러니까 함께 한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그 소유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 문에 들어온 사람들이 소유권의 증거이자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통해서 소유권이 확증 된 것입니다. 이 당시에 세겔이나 달란트나 이런 화폐를 통한 거래가 전부였죠. 그리고 그 거래를 확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걸로 확정 짓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그 후입니다. 드디어 이제 모든 거래가 마쳐졌어요. ‘그 후에’ 사라가 죽을 때 하나님의 땅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왜 사라의 죽음이 창세기 한 장에 걸쳐서 나올까요? 나중에 야곱의 죽음도 한 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창세기라는 한 장 내에서 중간에, 23장에 사라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까요? 그것은 사라가 하나님 안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라가 죽을 때 주님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가나안 땅은 브엘세바에서 단까지가 가나안 영역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안에서 주로 살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여기를 벗어났던 것이 딱 두번 있었는데, 첫번째는 기근으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이고 지난 번 브엘세바 남쪽에 있는 그랄에 잠시 체류한 경우 말곤 없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땅에 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라가 아들을 90 세에 낳고 드디어 사라가 헤브론에 가자고 제의했겠죠. 왜? 자기가 살았던 곳이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헤브론에 올라갑니다. 왜? 이것은 사라가 드디어 이땅의 안식은 원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안식을 추구하게 된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라가 나가 먹었을 때 그 신앙이 더 올라간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 신앙이 나이 먹었을 때 점점 올라가는데 지금 사라가 더 올라갔어요. 그래서 헤브론에 장사된 것을 상징합니다. 물론 헤브론에서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있죠. 예루살렘에서 지난 번에 모래산이 있죠. 모래산은 영생을 말하고 지금 사라가 죽을 때 여전히 영성이 좋았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 입니다. ‘가나안 땅’ 정말 재미있어요. 물론 원어와는 많이 다르지만, ‘가나안 땅’ 하나님은 항상 가나안 땅을 강조하세요. 지금 어디서 죽었느냐 이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디서 죽느냐. 가나안에서 죽는 거에요. 즉 구원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마므레는 아모리 족속이었고 막벨라는 헷 족속이었습니다. 지금 이 사라는 가나안 안에 예수님 안에 죽었고 헷 족속이 있는 그 성 안에 가장 좋은 땅에 장사된 것을 의미합니다.

20절입니다.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확정되었더라’ 드디어 구원이 확정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언제 확정됩니까? 우리 구원은 완성이 없어요. 완성은 죽을 때 확정됩니다. 천국 확정은 죽을 때 돼요. 그 전엔 전부다 미완성 입니다. 전부 다 우리는 확정 할 수 없어요. 성령 세례, 거듭남, 마귀에 대한 승리, 나름 대로의 어떤 계시, 은사 전부 아니에요. 제가 말했지만 유사 기독교에도 부흥이 있고요. 거기도 체험 있고 응답이 있고 다 있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구원 굉장히 어렵습니다. 구원이 보통 어려운게 아니에요. 성경에 있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구원을 누리고 매일 구원 안에 거하기 위해 하는 것이 이게 바로 영적 싸움이에요. 영적 싸움이란 것은 어떤 문제와의 싸움이 아니고 영적으로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느냐 안 거하느냐를 가지고 늘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원하실까요? 지금 사라가 막판에 나이 먹어서 과거에 이사했던 그 먼 길을 다시 이사를 왔어요. 하나님을 향해서.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죽음을 계획한 이유가 사라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과 뜻대로 하자는 마음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귀히 보시고 드디어 이렇게 한 장에 걸쳐서 사라의 죽음을 쓰신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생을 잘 살 수 있을까요? 다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가지에요. 하나님의 뜻, 거기에 우리 목숨을 거는 겁니다. 거기에 모든 걸 거는 거에요. 그것을 수용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 올까요? 아니요. 좋은 일이 오면 사람들이 하나님 뜻대로 다 살겠죠. 하나님 뜻대로 하면 좋은 일이 안 와요.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을 얻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모든 걸 잃어도 돼!’ 이게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으면 이 구원이 감사해서 하나님께 우리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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