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22 | 창세기 22장 : 성령의 음성에 순종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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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22 | 창세기 22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창세기 22장 : 성령의 음성에 순종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4절까지)

1절입니다. ‘그 일 후에’ 그랄 땅, 블레셋 사람에 땅에서 브엘세바에 우물을 판 다음에 일곱 암양을 우물을 판 증거로써 주고 우물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 사건 이후에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 그렇다면 이게할까 안할까를 그냥 점수 매기는 시험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높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높은 단계의 명령을 의미합니다. 높은 수준의 명령. 그래서 시험이란 되면 시키고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명령권자 십니다. 명령을 준수하지 못 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아브라함이 수준이 높아 짐에 따라 높은 수준의 명령을 주었다는 얘기지, 단순한 Test(시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이었고 여전히 아브라함은 영의 귀가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삭이 많이 성장하였고 그 자라는 동안에 우리 같으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져서 음성을 못 들을 텐데 아브라함은 여전히 영적인 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자! 여기서 중의적인 표현인데 예수님을 상징하죠. 그럼 모리아 땅은 어딜까요? 나중에 솔로몬이 산에 성전을 짓고 통째로 바치는데 그 산이 모리아 산입니다. 지금 모리아라는 지역에,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오번역입니다. 일러준 산이 아니라 일러줄 산, 미래시제 입니다.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 아들을 죽이라는데 지체하지 않습니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운송 수단인 나귀, 나귀는 한 100 kg를 실어도 버틸 힘과 지구력이 있고 3 일을 안 먹어도 버틸 수 있습니다. 대신 나귀는 빨리 가지는 못 합니다. 천천히 가는 거죠. 지금 나귀에게 안장을 지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탈 수도 짐을 실을 수도 있게 한 것이죠. 당시 아브라함은 소, 양, 나귀 밖에 가지고 있는 동물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운 것입니다.

4절입니다. ‘제삼일에’ 자! 지금 삼일 걸렸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거리가 96 km 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하루 이동할 수 있었던 거리가 30 km 정도가 한계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체력이 하루에 30 km정도를 이동할 수 있었고 그래서 3 일만에 모리아에 다달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삼일 만일까요? 똑같습니다.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그리스도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상징합니다.

5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역시 아브라함이 지혜롭습니다. 젊은종들이 잘 모르고 번제를 막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기다리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자! 지금 아브라함이 아이라고 했죠. 아이라는 표현이 애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입장에서의 이삭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둘이 이제 동행하는데 이삭에게 나무를 들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한 손에는 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 이삭을 죽일 칼을 들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왜 여기서 양이라고 했을까요? 소도 가능한데. 왜냐하면 과거에도 일반적으로 소는 드리기 쉽지 않죠. 비싸고. 똑같습니다. 소는 비싸기 때문에 쉽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나중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놋 그릇을 막 치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다 쫓아 버리시죠. 왜 그러셨을까요? 대부분 백성들이 가치가 적은 비둘기로 번제를 들였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안들이고.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이삭이 볼 때 아브라함은 주로 양을 드렸었나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이라 지칭한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 함께 나아가서.’ 지금 답변이 재미있어요. ‘너야’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합니다. 원래 ‘여호와 이레’ 라는 말에서 ‘이레’가 준비한다는 말이에요. 근데 아브라함이 왜 이때 모른다고 말하거나 그냥 넘기지 않았을까요?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고 말하는 게 바로 영적인 계시라는 사실입니다. 할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할례는 율법적인 삶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할례는 율법에 대한 준수를 말하고 지금 아브라함의 단계는 이 단계가 아닙니다. 계시 단계에요. 지금 아브라함의 이 말은 예언입니다. 입에서 그냥 예언이 나오는 거에요 지금. 아브라함은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예언인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에 마음속에는 아들이지만 입에서 예언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자! 제단을 돌로 쌓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그 돌 제단 위에 모양을 갖춰 쌓습니다. 이삭을 묶고드디어 제단 나무 위에 놓습니다. 이삭이 항거하지 않았죠. 전혀 항거하지 않죠. 왜 항거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전혀 항거하지 않은 것처럼 이삭은 전혀 항거하지 않습니다. 이 순종이 이삭의 복이 되어 180세를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 일없이 인생을 살아가죠. 이 이삭의 순종의 마음이 사실은 아브라함에게서 온 것입니다. 자기를 묶는 데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님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이삭이 모형으로써 올려집니다.

10절입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손을 뻗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Slay(죽이다) 죽이려고 칼을 잡았다는 거에요. 여기가 오번역인데 막 죽이기 직전의 상황이 아닙니다. 칼을 지금 멀지 않은 곳에 둔 상태로,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잡고’ 가 원래 원어입니다. 그래서 칼을 잡아 아들을 확실히 죽일 정도의 포즈를 취한 것은 확실합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지금 음성이 들리는데 천사의 음성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분명히 천사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대하듯 대화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동반될 때가 있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우리는 생각 할 때 천사를 꼭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천사를 동반하실 때도 있지 딱 정해진 규정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신 적이 더 많았습니다. 다만 이 장면에서는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즉 이미 이삭은 번제로 드려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보실 때는 번제로 바쳐진 거에요. 왜? 이미 모든 Action(행동)이 취해졌고 죽이지만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제사가 끝난 것입니다. 예배가 뭘까요? 예배란 무엇일까요? 예배는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해진 예배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내 모든 삶을 바칩니다. 때론 물질로 드릴 수도 있고 헌신으로 드릴 수도 있지만 동반되는 것은 무조건적인 성령의 음성에 순종을 말합니다. 율법을 지켰어요. 그리고 산상수훈을 지켰어요. 그 위에 성령의 음성이 또 있습니다. 언제 임할까요? 성령의 음성은 갓 태어나 거듭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이 성숙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으로 들려옵니다. 그 오는 음성에 우리가 무조건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예배입니다.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숫양이 걸려 있습니다. 숫양이 누굴까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시죠. 만약에 아브라함이 그 산에 안 갔다면 그 숫양을 발견할 수 없었겠죠. 즉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속죄 받냐구요? 믿음으로 받는 다고요?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그 순종의 결과로써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입니다. 속죄는 내가 순종할 때 맨 마지막에 그리스도와 만나지는 것이지, 아브라함이 이곳에 안 오고 다른 곳에 갔으면 이 숫양을 못 만납니다. 예수님을 못 만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겠다고 구약을 보지 말고 신약을 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이론일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구약을 두고 신약으로 그냥 넘어가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왜 구약이 있을까요? 창세기부터 말씀을 통해서 점점 순종으로 변하면서 마침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거에요. 어떻게 만납니까? 어떻게 만납니까 숫양을? 바로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서 속죄의 적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는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이 이루어질 때 내 삶에 속죄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오번역이에요. 준비된다는 말이 원래 없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보여지리라.’ 입니다. ‘이레’라는 말이 ‘준비’를 뜻하기 때문에 오번역 한 거에요. ‘여호와 이레하리라.’ 맞아요. 아브라함이 ‘이레’의 복을 받았어요. ‘이레’의 복이 무엇입니까? 준비된 복일까요? No!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준비된 복이 아니에요. ‘여호와 이레’는 내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제사가 여호와께 드려져서 내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복을 의미합니다.

15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지금 두번째에요. 아까 처음에 아브라함을 불렀죠.

16절입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재미있습니다. ‘나를 가르켜’ 하나님을 맹세를 할 대상이 없으시죠.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지금 아브라함의 신앙이 굉장히 완숙해져서 자기 아들 독자 마저도 바쳤으니, 이제 보상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아브라함이 순종했습니다. 대속을 깨달았고 숫양을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보상입니다. 무슨 보상일까요? 속죄에 대한 보상입니다.

17절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원래 영어 표현이 이런게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노래를 노래하다.’ 이런 것처럼 원어로는 큰 복이 아니라 ‘복으로 복을 주고’입니다.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역시 원어로는 ‘번성으로 번성하게 하여’입니다.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시죠. 대적은 뭡니까? 마귀의 권세를 말하죠. 원래 원어로는 ‘내가 네 고백 위에, 너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문이’ 가 원래 원어 입니다. 헬라어로. 과거에 문에 의미는 문만 넘으면 이긴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하면 음부의 세력을 이깁니다. 즉 지옥 권세를 이긴다는 의미입니다.

18절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물론 단수로 되어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8절 말씀이죠. ‘네 자손들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네 자손이라고 하였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라.’ 즉 네 씨는 자손과 같은 단수 그리스도에요. 지금 아브라함이 그 숫양이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영으로 받고 속죄의 제사를 드렸고 드디어 아브라함이 구약에서 자녀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고 그 다음 구절이 또 다른 내용이에요. ‘천하 만민이’ 원래 원어는 ‘모든 민족들이, 모든 나라들이’에요.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자 17절에서의 자손은 혈통의 자손이고 그리고 18절에서는 ‘네 씨를 통하여서 모든 민족이’ 즉 신약 시대를 의미합니다. 구약 때 아브라함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구원 받죠? 신약 때는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에요. 달라요. 앞에는 아브라함의 씨가 번성하고 천국 갈 것이라고 하셔서 그대로 많은 유대인들이 천국에 갔죠? 신약 때는 ‘네 씨’ 단수,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이방인이, 모든 민족이 천국가는 복을 받는 다는 이중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는 아브라함이 구약에 한해서 큰 복을 받았었다는 사실로만 끝났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하여서 아브라함은 드디어 예수님을 통해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구원의 대명사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구원에 대한 복을 하나 더 얻은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드디어 아브라함이 돌아왔습니다.

20절입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지금 아브라함이 떠난 지 오래됐죠. 단순히 계산해도 75 세에 떠나 133 세니까, 58 년 거의 60 년 정도 됐죠. 이 동안 아브라함이 고향 소식을 못 들었나봅니다. 아마 오랜만에 들었나봐요. 거기에 살던 누군가 왔겠죠. 그래서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데라가 아버지고 아브라함, 나홀, 하란 삼형제 입니다. 하란이 죽습니다. 그리고 하란이 세 자녀가 있었는데, 첫째가 밀가에요. 그 다음이 이스가에요. 그 다음이 롯이에요. 그러니까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고 밀가와 이스가는 질녀들이죠. 근데 여기서 하란의 딸 밀가가 나홀과 결혼합니다. 그러니까 나홀이 조카랑 결혼한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자 아람은 누굽니까? 예수님 당시에 아람어를 썼죠. 아람은 시리아 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서 아람이 나왔어요. 굉장한 성공이죠. 원래 그 지역은 하란의 지역이었을 텐데 하란이 죽고 나홀에게 붙었을 것입니다. 자! 지금 아브라함은 아들 한 명 가지고도 사느냐 죽느냐 하는데 자기 형제는 자식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도 자녀가 많지 않았죠. 아브라함은 야곱과 에서를 봤죠. 그런데 에서는 나중에 배신하고 다른 대로 가버려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볼 땐 자손이 많다는 것이 미칠 지경이죠. 자기는 아들 하나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데 자기 동생에겐 자손이 많고 그 중에도 아람은 후에 정치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람어를 쓰고 있고 시리아가 아람어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때도 아람어를 많이 씁니다. 게바도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아람 대대로 그 권력이 유지됐어요. 근데 그런 아람이 아브라함의 동생의 손자에요. 그 다음 절입니다.

22절입니다.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여덟 명이에요. 한 명도 사느냐 죽느냐 하는데 동생은 여덟 명이니, 형제간엔 항상 경쟁심이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제가 잘되면 배아파요. 아브라함은 얼마나 배가 아팠을까요?

23절입니다.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여덟 째인 브두엘이 나중에 이삭과 결혼하는 리브가를 낳았죠. 다시 말하면 그래도 브두엘이 굉장히 영적인 사람인가봅니다. 그 중에서. 그래서 이름이 쓰인 것입니다.

24절입니다.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첩까지 있어요. 첩도 자식을 낳아서, 여덟 명 + 네 명으로 열두 명입니다. 여자를 다 빼고도, 여자까지 하면 보통 비율이 1:1이니까 24명 정도 될 수 있어요. 아브라함은 한 명 가지고 떨고 있는데 동생은 열 두명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비참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참기독교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참기독교는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참기독교는 부흥이 원래 어려워요. 절대 순종만이 참기독교 입니다. 이 절대 순종을 소유해도 주변 상황이 달라질까요? 아니에요. 여전히 이삭 밖에 없어요. 이삭도 야곱 밖에 없어요. 그리고 야곱 때는 드디어 늘어났지만 다 천국 가진 못했죠. 여기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있지만 범죄인들이 많습니다. 르우벤은 빌하를 강간하고 다 같이 동생 팔아먹고, 다 지옥입니다. 숫자는 늘었어요.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숫자는 늘었어요. 하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애굽으로 갑니다. 애굽은 뭡니까? 불신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이 다 지옥 가는 겁니다. 혈통의 자손이 다 지옥에 가는 것 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이 가졌고 이삭이 가졌고 야곱이 가졌던 순종의 신앙이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신앙이 있다고 해도 내일은 보장이 안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싸우는 거에요. 바울이 날마다 죽겠다고 했습니다. 왜? 천국이 보장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날마다 회개합니다. 날마다 하는 신앙. 그래서 매일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맞서서 길을 갑니다. 환란이 뭐에요? 사자, 곰, 표범이 영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구원을 상실 시키기 위해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영적인 승리입니다. 승리를 어떻게 합니까? 그게 바로 종교에요.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 종교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목사님께 지도를 받고 말씀 보고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구원은 장담할 수 없어요. 장담 아무도 못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 말씀에, 뜻에 순종합니다. 마치겠습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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