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21 | 창세기 21장 : 유사기독교-타종교-참기독교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창세기 21장 : 유사기독교-타종교-참기독교
1.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34절까지)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원어는 ‘방문하셨고’ 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방문하다’ 굉장히 애매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죠. 방문을 또 왜 하실까요?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실제 삶에 관여하시는 커다란 일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늘 하나님을 만나는데 하나님을 강하게 만날 때가 있죠? 그 강하게 만나는 만남.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2절입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표현할 때 여자가 남자에게 아기를 낳아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얘기할 때 여자가 아기를 '낳았다'라고 표현하는데, 히브리어로는 여자가 남자에게 아기를 '낳아주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항상 사고가 남자가 아들을 낳는 것이고, 여자가 낳아 주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표현하는게 저희한테는 약간 어색하지만 이게 맞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사실 이 이삭이라는 이름은 원래 있는 이름이에요. 붙인 이름일 뿐이라 생소한 이름이 아닙니다.
4절입니다.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천국에 들어간다는 증표로써 받은 것이죠.
5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절입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가 특별히 슬펐던 건 아니겠죠. 그러나 사라의 마음 속에 아기가 없는 것에 대한 짓눌림이 항상 있었단 얘기죠. 우리도 남자가 돈이 안 벌리면 어깨가 무겁다고합니다. 그리고 옛날 시대에 여자들은 애기가 없으면 어깨가 무겁다고 하였죠. 그러므로 ‘웃었다’라는 것은 사라가 그동안 속으로 늘 눌려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에요. 사라가 이제야 ‘나는 내 할 일을 했다’는 것이죠. 만약 사라가 아기가 계속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평생 한이 되죠. 그런데 드디어 눌린데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7절입니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자! 아브라함 노경에 사라가 젖 먹일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죠. 사라 나이가 90 이었고, 옛날에 오래 살았다고 해도, 지금으로 치면 적어도 60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지금도 60 에 아이를 낳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죠. 최소한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60 세, 65 세 폐경이 오는 나이가 50 세에서 55 세 정도이니까 폐경이 지난 다음으로 적어도 60은 된 것이고 혹은 70 정도 일 수도 있죠. 그러니 이런 나이에 누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하겠냐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자! 젖을 언제 뗄까요? 보통 한 살에서 3살 사이입니다. 3살이 되면 이빨이 너무 강해요. 3살에는 이빨로 젖을 물기 때문에 도저히 젖을 물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Maximum(최대)가 3년 입니다. 그래서 형제간 나이는 3살 터울이 Maximum(최대)이에요. 가장 긴 터울이. 그리고 젖을 먹을 때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젖을 먹일 때는 배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빠르면 한 살인데, 1 살 같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나중에 이스마엘이 놀렸다고 되어있는데, 한 살을 놀렸을 것 같지는 않아요. 당시 이스마엘의 나이는 15 세입니다. 아브라함이 85 세에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아무 인지 능력이 없는 아이를 놀릴 수가 없거든요. 아주 갓난 아기를 놀리겠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론 2 살, 많으면 3 살인데, 사라가 이삭을 너무 사랑해서 고통을 참고 젖을 오래 먹였을 수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많으면 4 살까지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리면 2 살, 많으면 3 살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9절입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자! 놀렸다고 되어있어요. 왜 놀렸을까요? 보통 15 살 사춘기 때가 누굴 놀리는 걸 제일 좋아할 나이죠.
10절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자! 여기서 그가 누굽니까? 그는 사라인데, 갈라디아서에서 사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얘기 합니다. 놀라운 장면 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똑같은 구절을 인용하는데 하나님이 이 말을 하나님 말로 인용하십니다. 뭐냐하면 때로는 내 주변인의 말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꼭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꼭 내가 어떤 음성을 들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때로 우리는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하는 그 말이 하나님이 그의 입을 통해서 하신 말씀일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심지어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기면서 한 신하가 다윗을 조롱하면서 가니까 요압 장군이 죽일까 물어보지만,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그에게 시켜서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 누가 아느냐?’ 다윗의 신하가 다윗을 배신하고 다윗을 무시하는데, 다윗은 그 순간에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 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사라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너무 명확하게 말하죠. 신기합니다.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전 놀랍게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웃긴 말이 나옵니다.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기업을 얻지 못한다 라는 건 우리말로 천국 못 간다는 말입니다. 기업이 천국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갈라디아서에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갈라디아서 5 장 말씀이죠? '하늘의 유업을 얻지 못하리니' 똑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십니다.
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지금 아브라함이 얼마나 거룩해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은 사라가 한 말입니다. 만약 저희 같으면 마누라가 미쳤다고 하겠죠. 아브라함이 권한을 가지고 있고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인데,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인데, 이를 내쫓으라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노한 것이 아니라, 근심한 것 입니다. 아니, 이게 근심할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만나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자기 아내가 한 말인데. 이게 바로 영적인 수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의 어떤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라.’ 드디어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헷갈려 하고 또는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말로 아내가 이 일로 괴로워하니까 고민하고 있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사라가 쭉 올라갑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라.’ 이삭을 통해서 난 자만 네 씨라는 것입니다. 즉 이삭을 통한 신앙만이 이게 천국 가는 신앙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론은 천국에 가는 신앙과 아닌 신앙을 구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 하갈의 신앙은 뭘까요? 유사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13절입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자!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 입니다. 한 민족이란 번영, 부흥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앙도 다 부흥하게 되어있어요. 우리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의 숫자적인 부흥을 보고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죠.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신앙도 그러지 못한 신앙도 부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흥만으론 평가할 수 없는 거에요.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아브라함은 아침형 인간이었나 봅니다.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나서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 하갈에게 주고 이스마엘과 같이 보냅니다. 굉장히 마음이 아팠겠죠. 자!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어요. 브엘세바 광야는 어디일까요? 현재의 네게브 입니다. 브엘세바가 가나안 제일 남단이고 네게브가 브엘사바를 끼고 있는 사막 지역이에요. 이곳에서 하갈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방황하고 있을까요? 왜 방황하냐 하면 네게브 밑에는 가데스 광야가 있고 그 밑에는 신 광야가 있습니다. 또 그 밑에는 바란 광야가 있어요. 제가 보기엔 하갈이 길은 어느정도 알기 때문에 더 내려가도 광야고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있는 브엘세바 쪽으로 다시 올라갈 수도 없기 때문에 방황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그냥 길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그냥 일반 수풀입니다. 물이 떨어지니까 해라도 피할 수 있게 아들 이스마엘을 수풀 아래 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않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드디어 웁니다. 하갈이 기도합니다. 과거의 하갈은 가데스 광야와 술 광야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났죠. 이번에는 이스마엘을 두고, 화살 사거리 정도니까 20 m 정도 됩니다. 20 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드디어 하갈이 우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그런데 이상합니다. 하갈이 울었는데 하나님의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즉 이스마엘이 분명히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분명해요. 분명합니다. 이 때 이스마엘의 나이가 15살로 신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이 때 기도를 안했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갈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라고 기록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이 때 이스마엘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천사가 와서 하갈을 만납니다. 뭡니까? 이런 유사 기독교에도 계시가 존재합니다. 천사가 올 수 있습니다. 음성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미혹되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절입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드디어 응답이 임해 샘물이 발견됩니다. 우리는 때로 응답을 받고 큰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하갈도 응답이 두 번이나 이렇게 임합니다. 아마도 하갈의 맘 속에는 ‘나도 역시 믿는 자이구나.’ 라는 마음이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 여종과 그 아들을 쫓으라.’ 이런 신앙을 쫓으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신앙이 아닌 것들은 쫓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20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함께 계시매, 세상에 여호와 삼마에요.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하십니다. 이런 의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땐 이스마엘이 타락하기 전이 아닐까? NO! 아닙니다. 만약에 이스마엘이 타락 전이라면 그를 쫓아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천국 갈 사람을 쫓아 낼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갈과 이스마엘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에요. 그럼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요. 나중엔 물론 함께 하심이 사라지죠. 우리가 구원이 이탈되어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신앙을 이해할 때 내가 아는 것으로 신앙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자!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어요.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아마도 수렵이 이스마엘의 먹고 사는 주업이 된 것 같아요. 수렵 생황을 합니다.
21절입니다.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자! 말씀드렸 듯 네게브가 브엘세바에 있는 광야죠. 그리고 좀 내려오면 신 광야가 있고 바로 밑에는 바란 광야가 있어요. 바란 광야는 시나위 반도 동편입니다. 계속 남하합니다. 그러다 나중에 아라비아로 가게 되는데, 자!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으로 광야에 점점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나안 신앙이 있고 광야 신앙이 있습니다. 가나안 신앙은 순종을 신앙이고 광야 신앙은 불순종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광야 길에서 왜 많은 경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옥을 갔느냐?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다 지옥에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스마엘 점점 광야로 내려가는 것 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자! 지금 애굽 땅이죠. 부인이 애굽 여자입니다. 어머니인 하갈도 애굽 출신 여자이죠. 즉 자기 부인이 불신자인 것입니다. 그럼 이 불신자라는 것을 왜 쓰셨을까요? 왜냐하면 진짜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 입니다. 지금 여기 이스마엘이 불신자를 거둬 들였습니다. 이스마엘 살면서 삶에서 정말 하나님 뜻대로 살았을까요? 아니에요. 이미 이스마엘이 쫓겨나기 전에 분명히 이스마엘은 이삭을 놀렸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행실이 안 좋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스마엘은 전통적인 농경이나 목축업이 아닌 수렵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어쩌면 복수심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선 내면 세계의 죄를 상징합니다. 그게 뭐로 들어나게 되었나? 바로 불신자와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자! 지난 번에 아비멜렉과 갈등이 있었죠.
23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굉장히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비멜렉은 블레셋 사람임에도 하나님을 믿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란 것입니다.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절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지금 아브라함은 잠시 그랄 땅에 체류 중인데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았어요. 지금 브엘세바의 우물은 사실 아브라함 것입니다. 그런데 브엘세바에 우물을 팠는데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책망한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비멜렉이 발뺌합니다. 아비멜렉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자! 우물을 빼앗겨서 우물을 찾아와야 합니다. 과거에 아브라함이 잘못해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남녀 종을 줬죠? 이번엔 아브라함이 주는 것이에요. 왜 줍니까? 우물을 빼앗겼는데 이 찾는 과정에서 주는 거에요. 정당한 거에요. 누가 팠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이걸로 값을 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에 대한 확정권을 얻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그런데 이상하 일이 일어납니다. 양들이 수양도 있고, 암양도 있고, 나이 먹은양도 있고, 어린 양도 있고, 소도 있는데 일곱 마리의 암양만 따로 두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일곱 암양, 교회, 참교회를 상징합니다. 성경에 일곱교회가 나오죠. 성막 안에 일곱 촛대. 일곱 구원의 숫자입니다. 열둘은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입니다. 셋은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여섯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둘은 복음 전파의 숫자입니다. 다 달라요. 자! 지금 일곱 암양을 따로 떼어 놨어요.
29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물어봅니다.
30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를 따로 받아 내가 이 우물을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우물을 내가 팠다는 것입니다. 우물의 소유권은 양과 소를 치뤘습니다. 그 다음에 우물을 판 것이라는 증거로 암양 일곱을 따로 둔 것입니다. 저작권을 받은 셈이죠. 아브라함이 팠다는 것이죠.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적으로 모든 우물들은 성령의 생수를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모든 우물들은 성령의 생수를 상징합니다. 자 믿는 자에겐 우물이 다 있어요.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흘러 나리라.’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샘물이 흘러 나리라.’ 요한복음 말씀이에요. 영생의 샘물이 항상 나옵니다. 처음에는 샘처럼 나오다가 나중에는 우물이 되는 것이에요. 우물은 성령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성경적 영의 흐름의 내용들입니다.
31절입니다.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절입니다.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자! 그랄이란 지역은 블레렛의 왕이 있던 장소였고 그랄에서 동북쪽으로 위쪽에 브엘세바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이 블레셋이 당시 브엘세바 지역을 점령지로 여겼겠죠. 그런데 변방이었겠죠. 그리고 변방에 있는 브엘세바에서 우물을 팠고 드디어 브엘세바는 가나안의 최남단이 된것입니다. 자! 가나안이 뭐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동시에 성령의 임재로 충만한게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합니다. 젖이 Milk이고 꿀이 Honey에요. 과연 가나안 땅에 소가 많아서 젖이 많았느냐? 가나안 땅에 벌이 많아서 꿀이 많이 났느냐? 아닙니다. 젖과 꿀은 성령의 생수를 상징합니다. 이 가나안 땅은 순종의 땅이면서 동시에 이 땅은 항상 희락과 기쁨이 넘치는 땅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이 브엘세바에요.
33절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원어는 우물이 있으니까 잡목들을 심었다는 것입니다. 광야가 있고 파서 물이 나오면 오아시스입니다. 오아시스 주변에는 나무를 심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많이 심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거기서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목축의 근원이 됩니다. 농경과 목축에 우물이 기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과일을 맺으며’ 우리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나한테 넘쳐 올라서 우리 삶에 열매가 맺혀집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열매의 근원은 내 영 아니라 성령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맺을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 기쁨입니다. 화평, 평안이에요.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충성, 오래 참음, 이 아홉 가지가 성령이 맺는 열매입니다. 우물이 하나 있으면 옆에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랍니다. 이게 바로 에셀 나무 입니다. 그게 나를 통해 열매를 맺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 자!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이름이에요. 중요합니다! 구원이 완성될 때에요. 완성 될 때 유사 기독교인 하갈의 신앙과 타종교에 비슷한 아비멜렉의 신앙과는 전혀 다른, 영원하신, 즉 아브라함은 드디어 영원한 구원을 세계에 들어갑니다. 우린 영적으로 완전한 구원의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34절입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체류하였더라. 이걸 왜 쓰셨을까요? 아브라함의 신앙이 참 신앙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말합니다. 우리 영은 완전함에 도달할 때까지 어느정도 계속 성장하며 바뀌어 나갑니다. 블레셋은 귀신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영이라는게 영적인 성장이 빨리 도달해서 안전권에 도달돼야 하는데, 아직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서 귀신의 작용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귀신은 많아요. 우리 신앙은 많은 것들이 귀신과 하나님과 이 혼동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그런 것을 거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싶은데 늘 방해가 영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완전한 선으로 나아가는 데 중간에 귀신이나 블레셋 때문에 위협받을 때가 있어요. 우리는 이것을 다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어둠에 세력들을 다 쫓아내고 완전한 선이 나를 주장할 때 우리는 다음 장에 있는 아브라함처럼 완전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치겠습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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