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20 | 창세기 20장 : 선지자와 의인의 죄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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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20 | 창세기 20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창세기 20장 : 선지자와 의인의 죄

1.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18절까지)

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네게브는 오번역이고 그냥 남쪽 지방입니다. ‘가데스와 술 사이’ 가데스는 이스라엘이 들어갈 때, 가데스 광야를 걸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가데스 광야를 이스라엘이 두 번 지나는 데 한 번은 홍해 건너고 1년 뒤에 있었고, 그 다음에 요단강 건너 오기 전에 건너오려다 실패합니다. 가데스 광야는 오른쪽에는 바란광야가 있고 바란 광야 끝에 아카바만 안쪽에 있는 엘리엇, 가데스 왼쪽 밑에는 술 광야가 있고, 오른쪽 밑으론 바란 광야고, 위쪽에는 신 광야가 있고, 신 광야 위쪽에 네게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데스와 술 사이’ 상당히 지역이 안좋은 것입니다. ‘그랄에 거류하며.’ 오번역 입니다. 원래는 가데스와 술 사이에 머물다가 거기가 어딘가 안좋았는지 다시 그랄에 체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번역자가 오해했는데 아브라함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서 가데스와 술 사이에 거류하다가 다시 그랄에 체류하게 되어 그 체류한 동안에 사건입니다.

2절입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자기 신변 때문에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거죠. 여기서 그랄은, 블레셋이 지중해를 끼고 있는 가사가 있고 가사 13km 밑에 그랄이 있습니다. 그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브엘세바 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아브라함이 정착합니다. 지금 이 내용은 브엘세바에 정착하기 전 사건인 셈이죠. 이 그랄은 블레셋,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데, 선조는 미슬라임이라는 애굽과 수단, 북부아프리카에 살던 민족에 밑에 가술루임에 자녀 한명이 블레셋이에요. 블레셋은 미슬라임의 애굽 지역에 살다가 올라와서 시나이 반도 위로 와서 세운게 그랄 지역에 있는 블레셋입니다. 팔레스타인이죠. 가나안 지역은 함의 자손 가운데 가나안이라는 선조가 있었죠. 그래서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은 다 가나안 족속이고 블레셋은 애굽 지역에 있는 족속과 맥을 같이 합니다. 혈통이 말이죠. 그래서 이 블레셋 사람들이 그랄 지역에서 살아가다가 나중에 가사를 점령합니다. 그 다음에 에스골롯, 아스돗, 에글롯, 가드 다 수도 이름들 입니다. 특히 가드는 지중해 연안에 있지 않은 내륙 지역이고 이런 지역들에 블레셋 족속의 혈통이 다 가나안이 아닌 애굽 미슬라임 족속에서 이어진 혈통인데, 이 블레셋, 지금의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내용은 팔레스타인과 갈등의 시작인 것이고 그 중 그랄의 왕과의 이야기입니다. 나중에는 이 5개 도시에서 왕을 선출하는 부족 동맹이 되지만 지금은 그 상황은 아니고 그랄 지역의 왕, 전쟁을 일으키고 타국은 공격할 수 있는 국가 체제를 이룬 상태에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내용입니다. 여기서 사라의 나이는 90 세 인데 그럼에도 예뻤나 봅니다. 정말 외모가 출중하지 않고는 한 나라의 왕이 첩도 있는 왕이 굳이 말도 안 통하는 이방 여인을 데려오게 하겠습니까? 실제로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90세 임에도 그랄의 왕에게 첩으로 들어간 상황입니다.

3절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꿈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이 사람이 이방인임에도 엄청나게 신령합니다. 꿈에 하나님을 만난다? 보통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찾아가서 나타나십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이 있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얼마나 신령하냐하면 여기서 오역인데,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네가 죽으리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라고 이미 산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고 그 이유는 남편이 있는 여인을 데려왔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즉 간통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은 당황스럽겠죠. 자기는 누이라고 해서 데려왔는데.

4절입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자기 변호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멸하시나이까’ 는 사실 원어로 ‘무자비하게 죽이다’ 입니다. 즉 ‘살상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살상하십니까?' 라고 변명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지금 아브라함도 누이라고 하였고 사라도 오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죄가 없다는말입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라와 아브라함이 남매가 아닌 결혼한 사이임을 밝히시고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손 대지 못하게 미리 말씀하신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7절입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선지자라는 말을 처음으로 하십니다. 선지자가 뭐냐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선지자를 예언 은사 받은 사람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은사자일 뿐입니다.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과 친구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보실 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사람 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죄를 알려주죠. 왜? 그들을 구원 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장래를 알려주시죠. 그리고 의인은 뭡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의인이에요.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선지자고 선지자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 아비멜렉이 나을 수 있다고 산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비멜렉이 역시 신령합니다. 일찍 일어나 신하들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9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지금 상황이 역전 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아브라함이 지옥에 가는 아비멜렉에게 꾸중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잘못 때문에 아비멜렉과 그의 나라가 위험에 처했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신령하죠. 지금 중요한 것이 하나님은 왕의 잘못에 대해서 그 나라, 국가와 그 백성에 대해서도 징계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에서의 가장의 잘못에 대해 가정에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에 징계 방법은 한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 때문에 같이 동반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한 명의 죄 때문에 단체가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자신과 자신의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지금 아브라함 입장에서 블레셋을 이방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 혼자일 것이고 이 사람들이 아내를 빼앗고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논리입니다. 그랄은 율법이 없는 나라죠. 하지만,아브라함에게 의처증이 있던 것 같아요. 사라가 물론 예뻤겠지만 그래서 나이가 90 인데, 아직도 자신에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신을 죽일 정도로 다른 사람들 눈에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는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주 오래된 고질병으로 고쳐지지 않는 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지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큰 죄는 아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에 왜 이 일을 남겨두셨느냐? 바로 앞으로도 선지자가 나타날텐데, 그 선지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완벽하지 않습니다. 의인도 중죄까진 짓지 않지만 소죄를 많이 짓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짓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아브라함이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내부 세계에서 의처증 + 두려움 등의 여러가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나중에 나오는 데 아브라함이 이것을 공식화하여 사라한테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두려운 마음이 상상 안 가지만 실제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12절입니다.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이복은 아버지는 같은 데 어머니가 다른 것을 말하죠.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여기가 사실 원어로는 방황했을 때에요. 그러니까 데라의 집을 떠났을 때 아브라함 입장에선 굉장히 방황을 했다고 의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온 것인데 아브라함 입장에선 헤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이건 지금 일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이 데라의 집을 떠나 가나안에 올 때 이미 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사실 여기서 은혜는 오번역이고 원래는 배려입니다. 진짜 자신을 생각하면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던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비멜렉이 지금 후대 합니다. 여기서 종들은 사실 오번역으로 원래는 남종들과 여종들입니다. 며칠이 지났을 까요? 정확한 건 모르죠. 하지만 사라가 아비멜렉의 집에 간지 며칠 만에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고 돌아온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지금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와서 가데스와 술 사이에 머물다가 뭔가 마음에 안들어서 그랄 영토에 들어온 것이죠. 그랄에 들어온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내를 빼앗겼다가 되찾죠. 여기서 ‘내 땅’은 어디까지 일까요? 브엘세바 영역까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그랄왕이 브엘세바까지 통치했다고 볼 수 있고 밑으로는 가데스 광야까지 통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영역 안에 마음대로 살라고 땅을 주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은 천개를 준다? 적지 않은 양입니다. 왜 줄까요? 이 당시 여자를 첩을 데려올 때 돈을 주게 되어있고 혹시 여자나 여자의 집안에서 반대를 할 경우 여자를 돌려보낼 때도 역시 돈을 주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동에서는 지금도 여자와 4 명까지 결혼할 수 있는 데 한 명당 2 천 만원을 주고 데려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에서 은 천개는 결국 사라가 첩이 되길 거부했고 오빠도 거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은 천개를 보상으로 준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여기서 또 오번역인데 원래는 ‘너와 함께 한 사람들과 그 모든 사람들의 눈들을 가리기 위함’ 이라고 되어있어요. 중요합니다! 결국 은 천개는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온 게 아니라 사라가 아비멜렉에게 왔고 아비멜렉은 그 보상으로 은 천개를 준 것으로 자신의 죄를 전가하는 것입니다.이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느냐? 바로 이 다음 구절입니다.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여기가 오번역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해서 그녀는 책망을 받았더라.’ 가 원래 원어입니다. 지금 사라가 남들이 볼 때는 동침한 자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 했지만.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시켜서 거짓말을 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침한 자나 다름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원어에서 하나님이라고 써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후에 아비멜렉과 관계없이 이 글을 남기십니다. 사라가 지금 아브라함의 얘기를 들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입장에선 사라가 죄를 지으면 그건 사라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당사자가 그 죄 값을 묻는 것입니다. 사라도 사람들의 눈을 가려 동침을 한 것으로 이해하게 됨으로 죄 값을 묻게 되죠. 즉 죄를 지은 당사자가 모든 책임을 묻는 게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결국 죄는 다 각자 라는 말입니다. 지금 만약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사라는 지옥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라에게는 수치가 된 것입니다. 언제?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 입니다. 만약 이 때 실제로 사라가 동침을 했다면 이삭이 누구 아들일까요? 어려워지죠. 결국 사라가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셨단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각자 각자가 죄를 끊고 버려야지 잘못 배우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절대 안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상대할 때 의인을 상대해야 하며 의인이라 할지라도 항상 그 말을 말씀에 대고 늘 점검을 해야합니다.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이것도 오번역인데, 그냥 여종이 아니라, ‘그의 여종’입니다. 남성 소유격. 쉽게 말하면 아비멜렉은 아내도 있었고 여종, 첩도 있었습니다.게다가 출산까지 합니다. 즉, 아비멜렉은 사라를 첩으로 들여 음행죄를 지을 뻔 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여종을 첩으로 들여 음행죄를 지은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도 하나님 잘 만납니다. 얼마나 신령합니까? 중요한 것은 신령한 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것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하다란 것은 삶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고 찬양이 뜨겁고 응답을 많이 받고 이런 것은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안 짓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참 쉽게 만나지만 아내도 있고 첩도 있고 그럼에도 또 첩을 들여오려고 하는, 쉽게 말해 호색한 입니다. 이런 호색한 임에도, 지금 사람들이 본다면 하나님 만나는 신령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날 한국 교회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10대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다 호색한 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왜? 설교를 잘한다는 거에요. 너무 안타깝죠. 아비멜렉이 지금 죄를 이렇게 지음에도 왜 계속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 만나니까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아비멜렉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아요. 곳곳에 투성이에요. 또 복도 받아요. 응답도 받아요. 응답이 임하니까 간증을 하죠. 응답 받는 것, 만나는 것, 계시 받는 것 이런 모든 것은 신앙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계명 순종이 가장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위에 모든 것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십계명, 산상수훈 그리고 많은 말씀들 이것들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 위에 세워지는 것이 신앙 세계 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지금 아브라함이 기도함으로 출산을 하게 치료를 받았는데 과연 바로 그 출산하는 것을 봤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라가 지금 소돔
과 고모라가 멸망한 지 얼마 지나 이 그랄에 왔겠죠. 그러므로 사라가 이삭을 출산한 뒤에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의 출산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출산이 사라의 출산 후에 이루어져야지 실제로 의인인 사라가 그 치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만약에 이 때 임신이 했다고 하면 말도 안됩니다. 이 사건 뒤로 사라가 임신을 하고 10개월 후에 출산을 해야 사라도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라가 출산을 하는 순간에 드디어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죄입니까? 남들이 죄인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이 바로 속죄입니다. 속죄란, 나는 완전하지 않고 남들도 나를 죄인으로 여기는데 하나님이 나를 죄가 없다고 생각을 하십니다. 바로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속죄의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속죄는 어떻게 입혀질까요? 속죄는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사람에게 입혀진다는 것이 4복음교회에 초석을 이룬 놀라운 교리입니다. 이것이 제가 가지고 있고 다른 교파들과 다른 교리입니다. 바로 속죄가 누구에게 적용되느냐 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니까 속죄는 아무한테나 안해줍니다. 반드시 성결을 이룬 자에게만 입혀지는 것입니다. 바로 계명을 준수하고 죄를 사함 받아서 깨끗한 사람에게만 속죄가 적용되지, 지금 아비멜렉처럼 호색한에게는 절대 속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이 하나님은 만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진짜 속마음까지 만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결하여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그 속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결에 모든 걸 투자 해야합니다. 성결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영생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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