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17 |창세기 17장 : 진정한 할례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1.아브람이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27절까지)
1절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세 때에’ 사래가 75 세, 아브람이 85 세 때에 이스마엘을 임신하고, 86 세 때에, 이스마엘을 출생한 다음에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안보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아브람을 많이 만나주시지 않았나요? 그냥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을 깨닫는 일은 많이 있겠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만나시는 것은, 아브람에겐 지금 10번째 만남입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 시절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몇 번 만났나 세어 본 적이 있습니다. 대체 아브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길래 이렇게 하나님을 10번이나 만날까요? 직접 대면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밖에 못 만납니다. 다 꿈으로 밖에 못 만나요. 이삭은 꿈과 만남이 반복되는 데 횟수가 많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위대한 부분이 뭐냐하면, 그의 인생 가운데 75 세부터 115 세 살아가는 동안에 10번을 만납니다. 굉장한 겁니다. 저는 딱 1번 만났습니다. 1번 만난 것도 저한테 너무 감지덕지 한데, 하나님을 10번씩이나 만난 것은 정말 굉장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아브람이 13년 동안 하나님을 못 만난 이유! 뻔합니다. 이스마엘 입니다. 이스마엘이 장성하는 과정 가운데 얼마나 아브람이 흥에 겨웠을까요? 학수고대 할수록 성과에 대한 기대가 커지니까요. 너무 기분 좋았겠죠. 그래서 아마 말을 안 듣는 사춘기에 접어들 때까지 아브람이 이스마엘에게 취해서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99세 때에 드디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나타나서’ 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반복되고 있죠. 전능한것을 알지요. 그런데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직까지 아브람의 마음 속에는 이삭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많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 일을 성취하는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꾸 전능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이 아주 중요한 요점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 무엇이냐하면, '내 앞에서 행하지 못했다' 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아직 그 말씀이 아직 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지, 늘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명령이 아직 미흡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 뜻대로 잘 살았지만, 자기 혼자 있을 때에는 혹은 자신의 내면 속에는 아브람 마음속에도 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항상 하나님 앞에 있게 되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말씀입니다. ‘완전하라.’ Perfect(완벽) 입니다.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아무 죄가 없으라' 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숙제이면서 아브람에 대한 요구 사항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때에 스스로는 다른 사람보다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기 판단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라! 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언약을 또 얘기하십니다. 하지만 언약의 내용이 조금 바뀝니다.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했던 말씀이에요. 그런데 3절을 보니까.
3절입니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이 드디어 엎드립니다. 지금까지는 엎드리지 않은 것 입니다. 앉아 있는 자세거나, 또는 서 있는 자세였고, 엎드렸더라도 이제서야 얼굴을 땅에 댄 것입니다. 아브람이 드디어 하나님의 위용 앞에 바짝 엎드려진 것입니다.
4절입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번엔 더 올라갔습니다. 옛날에는 많은 자손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민족입니다. 민족이 처음 나왔어요. '여러 나라의 아버지가 되리라' 는 것입니다. 드디어 아브람의 신앙이 올라갔기 때문에 축복이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모든 축복과 하늘의 상급은 우리의 신앙이 올라 갈수록 더 가중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영이 점점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는 동안에 축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땅에서도 가중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사는 동안에 점점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은 올라가다가도 내려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반복 되기도 합니다. 때론 구원 안에 들어갔다가 이 땅에서 지옥에 가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은 가변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람의 신앙이 적어도 좋아졌다는 얘기 입니다. 왜? 민족의 아버지는 처음이거든요. 이제까지는 많은 자손의 아버지, 조상이었는데, 여러 민족들의 아버지로써 축복을 가중 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또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이제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바뀌어서 아브라함이 됩니다. 아브라함 뜻이 뭡니까? 열국의 아버지, 여러 민족들의 아버지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할례를 통과했을 때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는 뭡니까? 할례는 완전한 구원의 인칭입니다. 인을 친다는 것을 뭐냐하면, 확인할 보증입니다. '왕의 인을 치다' 이런 보증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구원을 상실할 수가 없다!' 는 내용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성령님께서 역사 하셨다고 하면, 죄를 다 끊게 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보증은 보혜사가 될 때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드디어 할례를 통해서 구원의 보증으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이름으로 천국의 이름이 보증으로써 천국에 하나님이 써준 것입니다.
6절입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번성을 약속했는데, 거기다 드디어 민족들과 왕들이 나옵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민족적인 조상을 말씀해줍니다.
7절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처럼 믿는 후손과의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이것은 유효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대대로 이 언약은 유지되리라' 고 언약을 우리와도 체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나 언약 체결은 끝난게 아니라, 아브라함 후에 아브라함처럼 믿는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당연히 계약 체결이 지금도 이루어지는데 계약은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약은 일방적입니다.
8절입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뭡니까? 가나안 땅은 예수 안 입니다. 구원입니다. 생명입니다.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그 예수님 안이 우리에게 그 자체가 기업입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 천국을 상속 받습니다. 성경에서는 ‘유업으로 주리라’ 하고 표현합니다. 우리 말로는 그냥 ‘상속하리라’ 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유업입니다. 왜? 예수님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많은 축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 안에 가나안 땅에 대해 말씀해드렸 듯, 유업이 가나안땅이 아니라 영적인 세상이라고 증명해드렸죠? 지금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축복들을 받고 누리며 살기 때문에 우리가 유업을 받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믿었기 때문에 똑같이 우리들이 유업으로 받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는 죽은 다음에 영원한 천국을 우리가 상속받습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자 지금 언약을 말씀하세요. Covenant(서약, 언약) 입니다. New Covenant, Old Covenant 신약, 구약 입니다. 약속들입니다.
10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할례는 남자의 귀두를 감싸고 있는 포피를 그 당시에는 돌 칼로 짤라 내는 것입니다. 현재 용어로는 포경 수술입니다. '너희 중 남자' 남자는 구원 받은 자 또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를 상징합니다. '남자는 다 할례 받더라' 아마 그 당시에도 할례를 했었을 거에요. 왜? 하나님께서는 현재 이 지구에 없는 것을 말씀하지 않고, 원래 귀두를 덮는 포피를 두면 거기서 소변이 묻어 지저분해 집니다. 그래서 청결을 목적으로 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은 이 때 드디어 할례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할례의 언약이에요. ‘할례를 받으라’ 할례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바울은 표현하기를, 이 할례는 '마음의 할례' 라고 표현합니다. 육신 가운데 지저분함 어쩔 수 없는 죄가 인간 마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지만 사람마다 어쩔 수 없는 죄가 있는데, 그 죄를 끊어버리는 작업을 영적인 할례라고 합니다. 할례가무엇이냐? 내가 끊지 못하는 죄를, 그 죄가 큰 죄는 아니에요. 왜? 아브라함은 이미 99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벌써 23년이 지났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성숙했지만 그 내면 세계에서 끊지 못하는 죄가 있던 것입니다. 이 내면 세계에서 끊지 못하는 죄를 드디어 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벽한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갓 믿은 자가 아니라 영적인 99세, 예수님 안에 들어온지 23년이 지난 상태,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는 높은 단계에서 여전히 끊지 못하는 죄를 끊어버려서 마음이 죄가 없는 단계 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많은 방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방들이 다 여러가지 있습니다. 다 깨끗한데, 어디 하나 더러운 방이있습니다. 어디 하나가. 이쪽 방에는 음란의 방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다 깨끗한 데 미움과 시기의 방이 있고, 어떤 사람은다 깨끗한데, 이 쪽 방에 혈기의 방이 있습니다. 다 깨끗한 사람이 탐욕에 방이 있습니다. 이런 방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만나길 원하시는데 그 찝찝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뭐합니까? 바로 할례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나를 끝까지 나를 붙잡는 죄성, 이것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옥 가지는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해서, 어떤 복입니까? 민족의 조상 되기 위해서 더 완벽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있는 그 방마저 청소하시고 싶어서, 한 평신도 신학자가 말했죠. 중생이란?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앞 마당을 쓰시다가 갑자기 마루 위를 쓰시다가 마루 밑을 청소하시다가 안방을 쓰시다가 나중에 집을 엎어버리고 새집 만드는 것이란 말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13개를 다 몰랐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이것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닌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죄를 짓지 않았어요. 남들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고 완벽해요. 그런데 아무도 안보이는 은밀한 부분에서 균이 있고, 병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touch(손 대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가 무엇입니까? 완벽한 구원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음의 할례로써 이것을 풀어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 할 때,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 이 때 드디어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거듭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해주심으로 거듭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것 아닙니까? No! 그렇지 않습니다. 보혜사가 되는 것은 en성령, enparacletos 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에. 모든 성경에서 다 epi로 돼있어요. 다 위에 있는 것이고 안에는 없어요. 딱 두 군데만 안에 있습니다. 에스겔서와 요한복음에요. 그 때만 enparacletos로 되어있습니다. 할례가 임할 때 드디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모든 죄가 청산될 때. 분명히 나는 성령을 통해서 거듭났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 믿고, 성령님을 통해서 신앙 생활하지만, 진짜 우리 안에 내면에 세계에 들어오시진 못합니다. 왜? 불결하기 때문에! 왜? 성령님은 holy ghost, holy spirit이에요. 못 들어오세요. 단지 우리에게 역사할 뿐이에요. 물론 구원 받습니다. 구원을 안 받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 언제 들어오시느냐? 내 안에 모든 더러운 물이 나갈 때, 그 때 우리에게 보혜사가 되어주시는 것이에요. 보혜사에는 우리에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내용들이 차 있어요. 성령님이 보혜사인가? No!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보혜사가 되어주는 시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자만합니다. '나는 보혜사가 안에 계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3장 말씀처럼, ‘두드리노니’ 믿는 사람에게나이지, 안 믿는 사람에겐 아니에요. 그 믿는 사람이 뜨거웠던 사람이고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두드리노니’’ 들어가셔서 먹고 마시겠다. 성령님이 역사해서 드디어 내 안에 깊숙이 들어오는 장면이에요. 이것이 보혜사입니다. 드디어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생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더 거룩하게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입에서 죄와 우리가 심판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이 늘 평안한 상태로 살 수 있습니다. '어찌 그리 많은 것들을' 그것이 그 역할들입니다. 그 전에는 그게 부분적이었습니다. 왜? 역사했으니까요. 시므온 같은 선지자 운데서도 하나님이 위에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고백합니다. 성령님 거둬 가시는 게 싫어서 고백합니다. 사울도 예언하고 다 했어요. 하지만 성령님이 떠나가서 사울이 지옥갔습니다. 우리에게 밖에 있던 성령님은 떠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떠나갈 수가 없다! 우리가 신학이 거기서 온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말씀 그대로 ‘영원히 함께 하시리라.’ 아멘! 하는 겁니다. No! 그렇지 않아요! 함께 해주시는 사람, 보혜사가 될 때에만 그 사람은 구원이 완벽해 지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들의 조상되게 하리라.’ ‘너는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성령님께서 나에게 보혜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제 1의 보혜사입니다. 그리고 들어오신 성령님의 제 2의 보혜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성령님을 헷갈려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과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story(이야기)는 사실 epi 성령님이 하시는 일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epi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행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병이 잘 안 걸립니다. 드디어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쉽게 듣습니다. 주님과 대화가 쉬워집니다. 왜? 예전엔 밖에 계시니까 밖에서 계시를 통해 받았지만 이제는 안에 계시니까 알아요. 옛날에 어떤 특별한 은사를 통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보혜사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장래를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꼭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내용들, 그런 생각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알려주시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할례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기 전에 죄인이 하는 것 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이해할 때 사람마다 다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어느 위치에서 올라가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하듯 아브라함은 지금 할례라는 위치에 올라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위치를 늘 앙모해야 하며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할례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할례를 세례 라고 합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할례는 세례 아닙니다. 성경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할례는 우리에게 남은 모든 죄가 끊어지는 높은 단계의 차원에 신앙을 말합니다.
11절입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절입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자! 지금 어릴 때,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든 사내 그리고 심지어 팔려온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도 받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의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지는 데 나머지는 예고편으로써 알려주는 것입니다. 형식으로 말이죠. 할례를 지금 아브라함이 받아야 합니다. 나머지는 흉내를 내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습니다. 다 흉내를 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형식과 전통 가운데 흉내 내면 좋을 것이 있습니다. 할례, 흉내내라 이것입니다.
13절입니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너희 살에 있어? 지금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구원을 받지 못한 크리스천들, 그것도 이방인들까지 다 포함해서 할례를 다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꾸 교육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가장 좋은 전통들을 지금 사람에게 알려줘서 그들을 기독교화 시키는 방법으로 쓰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혈통들은 다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합니다. 낳은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그리고 안받으면 버리라는 것 입니다. 이 의식을 존중히 여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는 겁니다. 원래 세례가 똑같이 3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진짜 천국 가기 때문에 주는 세례가 있어요. 두번째는 ‘천국에 갈 마음을 가지고 네가 드디어 들어와라’ 라는 선포식 세례가 있어요. 마태복음식 세례 입니다. 그 다음은 뭡니까? 천국 갈 믿음도 없고 그냥 교회 다니니까 받는 세례가 있어요. 지금도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똑같이 존재하던 것입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절입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들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드디어 사래를 통해 나옵니다. 사래가 89세죠. 아브라함이 99세고. 자! 분명히 경수가 끊어졌고 사라는 생리를 안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장면에서 아브라함이 웃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학적으로도 불가능하거든요. 자기도 지금 경수가 끊어졌고, 정자도, 난자도 없는 상태에요 둘다. 없는 상태입니다. 지금 그것 때문에 이스마엘을 낳았죠. 아직 자기가 건재할 때, 낳았는데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 낳을 거야!' 이삭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완벽한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삭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것은 뭘 의미하냐면, 이삭은 완벽한 구원을 상징합니다. 할례가 왜 중요하냐? '네가 할례를 받으면 네가 완벽한 구원자' 라는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드디어 출산하게 됩니다.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아주 오버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아브라함은 지금 99세에요. 99세인데, 100세 라고 말합니다. 오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아브라함이 늘 100세된 자기 자신을 늘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왜? 그 당시에도 100세는 나이 많은 편이었거든요. 아브라함 시대에도.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내가 100세면 죽어야지’ 또는 ‘내가 100세면 더 살 수 있을까?’ 그런 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마음 속에 100세에 대한 커트라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자기도 모르게 내면 세계에서 100세라고 말했을 것 같아요.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가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죠. 자기가 나이가 많아서 못 한다고 하늘에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라도 지금 89세에요. 지금 출산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낳을 수 있을 까 ‘ 하고 의문하는 겁니다.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뭡니까? ‘ 하나님 그건 설마 아니에요. 이스마엘이 이어갈 것입니다.’ 하고 이스마엘을 제시하는 겁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이미 이름이 지어졌어요. 아브라함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야곱이라 하리라.’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이미 이름을 다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선 구원 받는 우리 각자에 대해서 이름을 다 지어놨습니다. 우리 이름은 하나님 앞에 이름이 다 있어요. 우리가 구원이 잃어버려지면 이름이 없어져요. 재미있습니다. 영의 세계는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리면 이름이 사라져 버립니다. 사무엘의 계시처럼 이름을 지워버리면 이름이 없어져버려요. ‘이삭이라’ 뭐에요? 구원자 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다 지어놔요. '너는 게바라 하리라'. 이름을 지어가지고 이름이 하늘 나라에 이미 다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삭의 이름이 이미 지어진 것입니다.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삭에게도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언약을 예비해두십니다.
20절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열두 두령은 사실 표현이 오역인 데, 열두 왕자입니다.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드디어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복을 주시죠. 이스마엘은 유사 기독교라고 말씀드렸죠? 이렇게 유사 기독교가 번성하게 됩니다.
21절입니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이삭이 애기인 데 어떻게 언약을 세웁니까? 하나님의언약은 일방적입니다. 이삭이 드디어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되죠. 하나님께서 이삭과 언약을 세운 거에요. 하나님은 아들하고도 언약을 세우시죠.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이 십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예수님 믿어야만 구원 받습니까?’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일방적입니다. 아주 일방적입니다. 신학은 일방적이에요. 신학은 조율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거의 안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뭘 하시면 일방적이에요. 그 일방성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도 일방적이고 다 일방적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도 일방적이고, 일방성이란 무엇입니까? 단지 내가 거기에 부합하냐 아니냐 뿐이지 타협은 없어요. 안 바꾸십니다. 드디어 이삭과도 일방성을 체결합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셨더라’ 아브라함이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요. 임재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3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이 날에’ 이것이 아브라함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발견하셨죠? ‘이 날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순종적이냐하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과를 하지 않습니다. 할례를 받다니, 얼마나 아픈데,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훨씬 많잖아요. 노예들도 많고, 근데 아브라함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날에’ 바로 지금 순종합니다.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우리는 이것을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은 것은, 야곱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족속을 죽일 때 이 전략을 씁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하니까 세겜 족속 추장한테 할례 받으면 결혼 시켜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렵냐하면, 그 당시에 세겜이 추격을 못해요. 지금이야 간단한 수술인데, 세겜 족속이 추격을 못해요. 지금 세겜 족속을 다 죽였잖아요. 항거를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것입니다. 세겜 족속들을 레위와 시므온 두 사람이 다 죽이거든요. 그 부족을. 그런데 다 당했어요.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싸워라도 보죠. 그런데 다 죽었거든요. 그리고 세겜족속 주변에 인근 동맹 부족들이 쫓아올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섭게 하여 못 쫓아오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쉬운게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볼 때는 포피 베는 일은 쉽다? 아니에요. 이 당시 기원전 1800년 정도 됐는데, 지금으로부터는 3천8백년 전 입니다. 이 당시 의학 기술로는 어려운 것 같아요. 마취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메스도 아니고 돌 칼이에요. 돌로 베는 거에요. 피가 얼마나 날까요? 이렇게 피가 엄청 나는 대수술을 하는데, 아브라함이 지금 그것을 그냥 그날에 다 해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를 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머지 있는 내 죄악을 끊어버리는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 이 아니에요. 우리가 죄와 싸우기를 피 흘리며 싸우며 죽을 정도로 싸워야 하는데, 이 싸움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쉽게 ‘요즘 세상은 그런 세상이야’ 하고 넘어가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뀌기 전까지 들어오실 수가 없어요. 왜 못 들어오느냐? 벌거벗고 있는 우리 모습에 못 들어오십니다. 다 청산해야 해요. 그런데 나머지 있는 것도 청산해야 하는 데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때로는 미디어를 끊어야 되고, 때로는 인터넷을 끊어야 되고, 우리 삶의 모양들을 다 새롭게 바꿔 나가야 됩니다. 만약 우리가 결단하지 않으면 죄가 안 끊깁니다. 여전히 똑같이 영화보고, 똑같이 TV보고 똑같이 인터넷보고, 안 끊깁니다. 불가능합니다. 말씀드렸죠. 금식하면 음란 끊어진다고. 어려워요. 굶으라 그겁니다. 굶으면 끊어져요. 배고픈 데 무슨 음란을 합니까? 굶어야 해요. 과거에 많은 중세 사람들이 많이 고행을 했어요. 고행의 원칙이 세 가지 인데, 첫 번째는 굶기, 밥을 안 먹는 거에요. ‘그렇게 믿어야 하나?’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 사람들이 바보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뭐에요? 잘 먹는 게 복이에요. 복 아닙니다. 잘 먹으면 뭐해요? 잘 먹고 잘 살면 우리가 죄가 늘뿐이지, 하나님과 가까워 지지는 않아요. 우리가 하루하루 순종적으로 살아갈 때만, 우리가 밥을 안 먹었어도, 죄를 끊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거에요. 안하면 죄 안 끊깁니다. 빈말 아닙니다. 두번째는 재산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난입니다. 우리는 돈이 복이죠? 돈은 복이 아닙니다. 돈이 들어오면 사람은 물건을 삽니다.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땅을 사고, 우리가 점점 육적이 됩니다. 좋은게 아니에요. 그래서 빨리 없애야 돼요. 없애버려야지, 돈이 있으면 결국 우리는 죄에 빠져요. 우리가 어려울 때는 자꾸 마음이 낮아 집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회개도 잘 돼요. 그런데 잘 먹고 잘 잘자고 아프지도 않으면, 회개 안 됩니다. 회개는 평생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결국 선택 입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구제를 하라는 거에요. 돈 있으면 우리가 신앙 생활 못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 못갑니다. 왜? 그것이 걸림돌이 됩니다. 세번째는 기도 생활이에요. 기도 생활을 해야만 우리 안에 어둠의 귀신이 위축이 되기 때문에 죄가 끊어집니다. 많은 죄들은 귀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기도 생활을 장시간 해야합니다. 우리는 기도 할 때 1시간 하면, ‘이야 많이 했다’ 이러지만 그것으로 안됩니다. 기도 생활은 무한대로 가야 합니다. 기도가 무한대로 갈 필요가 있어요. 저희가 주일날 기도를 3시간씩 하죠. 세 기간을 하면 그럼 무한대가 쉬워요. 그 다음엔 기도가 재미있어요 그 전엔 기도가 어려워요. 3시간 할 때 기도가 쉬워져요. 왜? 기도가 계속 오는 거에요. 하나님이 계속 충만함을 주시기 때문에 기도가 쉬워져요. 그런데 처음에 한 시간도 힘들어서, 했던 얘기 할 수도 없고, 힘들어요. 기도를 3 시간 이상 하면서, 3 가지를 해야지 죄가 끊어집니다. 우리는 죄가 끊어져야 진짜 평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가 끊겨야 됩니다. 이 모든 죄가 끊어지는 것이 할례입니다. 죄를 끊기 위해서 모든 걸 동원하는 것입니다.
24절 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정말 나이 먹어서, 정말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25절입니다.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이스마엘은 구원 받지 못한 크리스천입니다. 근데 세례 받습니다. 할례 받습니다. 왜? 죄를 끊으라고 선포 받은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절입니다.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불신자도 할례를 다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독교 문화를 유속 시키기 위해서 받게 합니다. 지금도 세례를 받게 하지만 이런 세례의원래 뜻을 알려주면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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