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14 | 창세기 14장 : 진정된 성만찬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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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14 | 창세기 14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창세기 14장 : 진정된 성만찬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24절까지)

창세기 14장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을 다 아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내용들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 한절 한절을 강해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단면들을 하나하나 배우고 연결해서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입체를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내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이것과 연계되어 말씀들을 확증해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가시는데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거듭나서 성령님이 내주하시지만,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 안의 본태적 어둠 때문에 자꾸 딴 걸 하나님으로 인식하여 신앙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관이 왜곡되고,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또 다른 관념적 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아니 내가 왜?’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성경말씀 전체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라는 입체가 전체적으로 들어옵니다. 사람도 쭉 같이 지내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도 말씀을 쭉 보면서 우리에게 입체화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정연되어지고 그 정연 가운데서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바르게 만드십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에는 난해한 구절과 쉬운 구절이 있는데, 우리는 난해한 구절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왜냐?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쉬운 부분만 뽑아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왜곡이 일어나요. 쉬운 구절도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다양한 면을 가지셨기 때문에 난해한 구절도 연구해서 알아내야 정확한 신관이 형성 됩니다. 오늘 내용도 쉽지 않지만 들어갑니다!

1절입니다.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 하류 직전의 바벨론을 거점으로 한 나라입니다. 아직 바벨로니아가 오기 전 나라 시날입니다. 아므라벨은 함무라비가 아니고 다른 사람입니다.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라살은 바벨론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도시인 갈데아 우르 중간에 있는 나라입니다.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엘람은 BC3000-680년 정도까지 오래된 국가인데 나중에 그 위에 있는 메데랑 합쳐서 메데 바사가 되어 바빌로니아를 공격하죠. 그 왕이 다리오 왕인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죠. 엘람왕 그돌라오멜은 당시 주변국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고임왕 디달이’ 고임이라는 역사적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 당시 어떤 나라들 중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오번역일 수도 있고요!

2절입니다.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소돔과 고모라지역은 5개국 입니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인데 소돔지역은 현재 사해 남쪽 지역으로 함몰됐어요. 5개국 중 소알만 남고 나머지 나라들은 사해 밑에 가라앉게 됩니다. 지금 현 상황은 페르시아 만에 있는 국가들이 멀리 가나안에 있는 국가들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니’ 싯딤 골짜기는 가라앉은 사해 남쪽 가운데 북쪽지역이에요. 그리고 그 당시 성곽들은 분명히 사해 남쪽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물줄기가 사해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데 골짜기가 형성되려면 지층이 갑자기 밑으로 내려가야 됩니다. 현재 사해가 해발 –400m 인데 싯딤 골짜기는 그들이 진입한곳보다 더 북쪽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군사학적으로 말이 안돼요. 군사학에서는 적들이 공격해올 때 더 높이 올라가 있어야 합니다. 고지에 있으면 훨씬 유리한데 왜 이렇게 했을까 생각해볼 때 분명히 적들을 이곳으로 유인해서 늪에 빠뜨리려는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해 남쪽에 있는 싯딤 골짜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이들이 십 이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 삼년에 배반한지라’ 엘람왕 그돌라오멜이 지금 중동 지역의 패권자에요. 그래서 주변 국가들이 조공을 바쳐오다가 소돔지역이 힘이 세어지니까 12년을 잘 바치던 조공을 거부합니다. 이에 화가 난 그돌라오멜이 주변국들과 동맹하여 쳐들어옵니다.

5절입니다. ‘제 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지금 엘람 왕과 그의 세 동맹국 왕들이 오고 있는데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아스드롯은 갈릴리 호수 오른쪽에 있는 도시로 현재 골란고원의 영역 속에 있습니다. 르바 족속은 장대가 큰 거인 족속인데 엘람왕과 동맹국들이 격파시켰습니다. ‘함에서 수스 족속을’ 함은 암몬 국가에 있는 성읍입니다.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사웨 기랴다임은 사해 동쪽 모압지역에 있는 성읍입니다.

6절입니다.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세일산은 사해남쪽에서부터 아카바 만 그 사이에 아라바 광야가 있는데 그 광야 동편에 있는 긴 산맥입니다. 호리족속은 그 세일산에 살던 족속입니다. ‘광야 근처 엘바란까지 이르렀더라‘ 이 광야는 바란 광야인데 시나이 반도 북부에 있습니다. 엘바란은 현재 에일롯이라는 도시입니다.

7절입니다.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엔미스밧은 과거이름이고 가데스가 현재 이름이에요. 이스라엘이 정탐군을 파견하는 가데스 바네아는 바란 광야 위쪽에 있고 가데스 바네아 북쪽에 가데스가 있어요. ‘아말렉 족속의 온땅과’ 지금 엘라왕과 그들은 아브람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다 쓸어주고 있어요.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하사손다말은 현재 엔게디 인데 사해 좌편의 높은 고원지대입니다. 이 고원지대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격파한 것입니다.

8절입니다. ‘소돔왕과 고모라왕과 아드마왕과 스보임왕과 벨라 곧 소알왕이 나와서’ 지금 그돌라오멜이 주변국들을 친 다음 진짜 싸울 대상인 소돔지역 나라들로 간 것입니다.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하기 위해 진을 쳤더니’

9절입니다.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과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드디어 네 왕과 다섯 왕이 맞선 상태입니다.

10절입니다.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왕과 고모라왕이 달아날 때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소돔왕과 고모라왕이 패하여 퇴각명령을 내린 겁니다.

11절입니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가고’ 페르시아만에 있는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네왕이 소돔 지역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가고

12절입니다.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롯이 그돌라오멜에게 잡혀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배경이며 서론입니다. 이것을 알고 읽으면 뒤가 이해됩니다.

13절입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아브람은 히브리 민족입니다. 히브리족은 아브람부터 시작됐나요? 모릅니다. 데라도 히브리 민족이겠죠. 이스라엘이 히브리어를 쓰죠. 아브람이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어에요. 그당시 다른 족속들은 언어가 달랐던 것입니다. 언어는 하나님이 언어를 나눈 그때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나홀과 그 후손들은 아람족에 속화되어 아람어를 썼겠죠. 족속을 나눌 때는 언어로 나누는데 지금 아브람만 혼자 히브리어를 쓰고 있고, 그래서 히브리족이 된 거에요. ‘그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니’ 아모리 족속이 거하는 고원지대의 마므레라는 족장이 있는 평지에 거주했었는데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이더라’ 마므레, 에스골, 아넬은 아모리 족속에 속한 어떤 족장들입니다. 아브람은 씨족인데 보호를 위해서 부족들과 동맹을 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군사적인 큰 위험이 존재했음을 암시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주변 이방민족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동맹을 맺은 것은 신변의 위협을 많이 느끼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헤브론 고원지대의 세 족속들과 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된 자 삼백 십 팔명을 거느리고’ 삼백 십 팔명의 종들에게 창으로 찌르고 화살을 쏘는 군사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군사적 위협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에 남종들을 사서 매일 훈련을 시키며 만일에 철저히 대비를 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동맹을 맺어놓고 또 한편으로 집에서 종들을잘 훈련시켜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단까지 쫓아가서’ 단은 이스라엘의 제일 꼭대기 헬몬산 중턱에 있어요.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입니다. 단 지파는 여호수아 때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자 위쪽 블레셋 북부 욥바 지역을 받게 돼요. 단 지파가 그 지역을 받은 다음에 거기 거주하지 않고, 당시 철기문명이 왕성한 블레셋을 피해서 위쪽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단지파가 있던 헬몬산 중턱에 현재도 이스라엘과 비슷한 성막 모양의 성전 유적이 있습니다. 단지파는 거기서 역사에 사라져버리고 사사기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단지파가 여기 올라온 것은 여호수아 때인데 모세가 여기를 단 이라고 쓴 것은 성령의 감동일까 아니면 그 당시 라이스란 지명을 모세가 순간적으로 단이라 했는지 그것은 의문입니다.

15절입니다. ‘그와 그의 가신들을’ 가신들은 삼백 십 팔명의 종들입니다.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막강한 엘람왕 군대를 밤에 쳐부수었습니다. 일반적인 각개전투로는 못이기기 때문에 아브람이 밤에 특별한 전략을 세웠을 것입니다.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다메섹은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입니다. 시리아는 헬몬산에서 위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다메섹 왼편 호바! 엘람왕 그돌라오메는 군사를 데리고 사해 요단강 동쪽으로 내려와서 왼쪽으로 올라간 것은 확실합니다. 아브람이 헬몬산 근처를 지나 호바까지 쫓아올라갔습니다.

16절입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들을 다 찾아 왔더라’ 부녀와 친척들은 여자와 사람들의 오번역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쫓아간 것은 롯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롯과 롯의 아내와 두 딸들을 건져낸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다메섹 호바에서 승전하여 드디어 롯과 부인과 딸들과 종들, 동물들, 물건들을 가지고 내려오는 중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아브람이 승리한 소식을 들은 소돔왕은 자신이 빼앗긴 종들과 물건을 되찾을 속셈에 아브람을 마중 나옵니다. 사웨 골짜기는 예루살렘 옆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상황이 승리로 종결지어진 이때 놀라운 영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이어지는 18절은 앞뒤가 없는 새로운 일입니다.

18절입니다. 살렘 왕이 등장하는데 살렘은 평화란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루는 도시, 살렘은 평화,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예수님이 통치하는 곳,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평안이 주관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 만난 장소가 기드론 골짜기인데, 때마침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떡과 포도주는, 주의 만찬에서 나오는데 창세기에서 왠 떡과 포도주가 나올까요? 멜기세덱은 예수님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왕은 아니에요! 이것은 당시 실제 인물이 아니고 영적인 사건입니다. 이제까지 아브람은 실제 왕들과 싸워 승리했는데 이건 실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갖고 나오신 거에요! 히브리서에 기록되기를 살렘왕은 아비도 어미도 없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내려오신 거에요, 아브람이 잘했기 때문에! 못했으면 뭐 하러 내려오시겠어요? 예수님이 내려 오셔서 떡과 포도주, 떡은 예수님의 몸이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 즉 대속의 은총을 가지고 내려오신 겁니다. 대속의 은총을 가지고 아브람에게로 온 겁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는 이 성찬은 영적인 사건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린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찬 예식을 안해도 됩니다! 이 성찬의 의미는 내가 정말 잘 할 때 예수님이 나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서 기도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이 사건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성찬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찬식을 하러 내려오신 거에요! 지금도 우리가 아브람처럼 한다면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에게 성찬하러 내려 오십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건이지 절대 아브람이 미사한 건 아니에요. 카톨릭은 미사 때마다 떡을 뗍니다. 오순절은 한 달에 한번씩, 장로교는 일 년에 두 번씩 성찬식을 하는데 안 해도 됩니다. 왜냐면? 정말로 내가 아브람과 같은 상황이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떡과 포도주를 먹여주십니다. 이것은 대속을 통한 영생의 보장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예수님이십니다. 성막모형에서 떡상이 있죠! ‘나는 산 떡이니’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예수님을 먹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데 우리는 그냥 카스테라를 먹어요! 그건 아닙니다!! 우린 분명히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하게 돼 있어요. 근데 누가 줘야 되는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예수님이 직접 주셔야 됩니다! 성소의 떡상 바로 뒤가 휘장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거에요! 드디어 떡을 먹었다는 거에요! 이것은 아는 거나 느끼는 게 아닌 실제 사건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지금 아브람처럼 된다면 우리도 여전히 산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일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가 이 장면을 잘 기록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런 의례와 의식에 너무 신경쓰면 안됩니다. 세례 안해도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듭나서 회개하면 천국에 이르는 깊은 회개가 터집니다. 그게 바로 세례요한의 세례입니다. 그 전의 회개는 구원받는 회개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가 구원에 들어가기 직전에 받는 영적인 세례인 세례요한의 세례가 있습니다. 그 세례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교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거 안해도 됩니다. 실제가 있기 때문에 이거 안해도 되는데 왜 하느냐? 자꾸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 안 들어가니까 모형들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성경에 없는 유아세례, 학습, 성찬 안해도 됩니다. 아브람처럼 진짜 본질이 나한테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신 멜기세덱이 구원이 확실하니까 영생의 떡을 가지고 와서 아브람에게 먹이시며 ‘너는 지금 천국간다’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축복권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축복권은 하나님께만 있어요. 이런 말 하면 안됩니다. “나는 목사야, 축복권이 있어. 나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야, 축복권이 있어.” 예수님에게 축복권이 있습니다. 사람은 중보 밖에 못합니다.드디어 예수님께서 아브람을 축복하십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고 말씀하셨죠. 그 축복이 드디어 아브람에게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누가 한 겁니까? 예수님이 한 겁니다. 우리가 영생천국의 복을 주는 사람의 살과 떡을 먹으면 드디어 영생의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시하게 돈 좀 번다고 축복이라 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보시는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영원한 영으로 사는 게 복이에요. 이것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살과 피를 먹인 후 아브람에게 잘 먹고 잘 사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영생하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20절입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위에 있는 므낫세, 갓, 르우벤, 에돔, 아말렉 그리고 아모리 전체를 다 친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아브람이 격파시켰죠. 문제는 ‘누가 했냐?’ 이게 본론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누리느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이 오시느냐? 다시 말하면 우리의 대적을 우리가 물리쳐야 됩니다. 그게 우리의 할 일이에요. 대적을 물리쳐야만 우리에게 영생이 옵니다. 어떤 대적일까요? 마귀입니다. 그돌라오멜은 마귀의 상징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합니다. 마귀를 이기면 죄를 안 짓게 됩니다. 죄에 머무는 한 마귀를 이긴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죄를 짓게 하고 성령님은 의를 행하게 합니다. 마귀가 역사하면 우리는 늘 죄를 짓게 되는데 우리는 모여서 뭐합니까? 예언이나 하고 있고 넘어뜨리는 신비한 체험이나 하고 있고 지금 마귀를 이겨야 하는 데 딴 거하고 있어요. 마귀를 이기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거듭날 때 성령님이 내주하시는데 이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죄를 이기게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죄를 이기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의 배후에 마귀가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 음란, 미움 뒤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 마귀인 그돌라오멜을 이긴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나면 평화의 왕, 살렘 왕 멜기세덱이 드디어 아브람에게 와서 영생의 복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군사적 위협 때문에 동맹을 맺고 종 318명을 거느렸으나 이제부터 아브람은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고 삶이 평안해졌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으로 마귀를 이기면 평안함이 찾아오고 우리 자신이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렘 왕인 것처럼 아브람이 이제 평화의 통치를 받고 삽니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십일조는 원래 처음부터 있던 거에요. 십일조는 아브람이 시초는 아니에요. 하나님의 법은 율법 전이나 영원히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한게 없어요.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 변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십일조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안 배워도 자동적으로 하게 돼 있어요. 천국가는 사람은 십일조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돼 있어요. 반대로 지옥가는 사람은 바쳐도 아까워요. 영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십의 일, 십의 이도 아까운 게 없어요. 그런데 가짜는 아까워요. 리빙스톤이 어릴 때 부훙회에서 헌금주머니가 돌자 거기에 자기 몸을 담아 드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영생을 받은 후 인간의 반응입니다. 나중에 리빙스톤은 정말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죠. 구원받은 자의 모든 헌금과 십일조는 예수님이 받으십니다. 이건 목사가 받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을 받으실 뿐 아니라 하늘에 다 기록하십니다.

21절입니다.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소돔왕이 지금 전리품을 취하러 왔는데 사람 값은 비쌌기 때문에 사람은 보내고 물품은 아브람에게 가지라고 말합니다.

22절입니다.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지금 소돔왕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데 아브람은 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길게 묘사하며 손을 들어 맹세합니다.

23절입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지금 아브람이 받으면 부자될 텐데 그러면 소돔왕이 자기 때문에 아브람이 부자 되었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오라기나 신들메끈 하나라도 가지지 아니하리라’ 사실 이건 인건비도 안 나오는 일이에요. 종을 318명이나 사서 자비로 훈련시키고 했으니 받아도 될 터인데 아브람은 안 받겠다는 거에요. 소돔왕에게 사람과 물건을 다 가져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마음이 탐심 제로임을 보여줍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회 돈을 횡령하죠. 다 지옥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만둘 때 전별금을 달라고 합니다. 이거 다 지옥 갈 목사들이에요. 천국 갈 사람들은 그런 탐심 없어져요. 아니 돈 몇 푼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겠어요? 지금 대한민국 기독교 목사들 다 지옥 갑니다. 제가 칼럼에 부자 목사들 다 지옥이라고 썼죠. 삭개오도 재산 팔았고, 부자 청년도 재산 팔고 난 후 예수님 따르라 했는데 지금 예수님이 그때하고 달라요? 그런데 대형교회 목사들 전부 부자에요. 탐심 백! 아브람과 달라요. 아브람은 자기 돈으로 기르고 훈련시켰어도 받을 거 안 받았습니다. 부자됨을 포기합니다. 부유함을 추구한다면 100% 지옥입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는 그러는 것이 맞겠지만 하나님을 아는데 왜 부유함을 추구합니까? 목사가 돈버는 목적으로 다단계를 하고 계를 하는 등 교회가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생을 추구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지 그런 건 나가서 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 자녀들은 유학 못 가는데, 목사는 교회 돈으로 자녀를 유학 보내고 도데체 정신이 있는 겁니까? 이 탐심이 제거되지 않는 한 천국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 일을 왜 성경에 썼을까요? ‘아브람은 이 상황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챙겼어’ 하고 후대에 보여주려고 쓴 것입니다. 나중에 창세기에서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시며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가 내 모든 명령과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계명을 지켰으니’ 라고 되어 있어요. 아브람은 율법 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나와 있어요.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아요! 아브람은 탐심제로입니다. ‘나 가난해도 좋아!’ 하면서 모든 것을 돌려 보냈습니다.

24절입니다.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군인들은 젊은 사람을 쓰죠. 318명이 전쟁을 하고 오면서 분명히 먹었겠죠. 소돔왕에게 먹은 건 이미 끝난 거니까 못 준다고 한 겁니다.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아모리 족속의 족장들인데 그들의 몫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빼앗은 몫에 대해서 소돔왕에게 가져도 된다고 하고 있지만,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가 빼앗은 몫은 아브람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법입니다. 그래서 소돔 왕에게 자신 것은 가져도 되는데 그들의 것은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세상 법을 능가하는 더 높은 법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법이 있습니다. 그 위에 높은 도덕이 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율법입니다. 아브람의 삶의 기준은 세상법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 법을 어기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람은 자기와 함께 싸운 사람들에게는 세상 법을 적용시키지만, 자신은 물질을 취할 권리를 포기합니다. 뭘까요? 하나님의 감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지극히 놀라운 도덕성입니다. 이것을 수행하는 자는 천국 갈 사람이에요. 그런데 만일 크리스천이 세상 법보다 더 수준이 낮다면 끝난 겁니다. 남이 볼 때 ‘어! 너 나와 다르네’ 해야 하는데 ‘뭐야, 나보다 못하네’ 하면 끝난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 모습을 보여 주면서 우리에게 보다 높은 법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내주하시면서 양심에 고통을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 법으로 맞다 할지라도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소송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를 왜 합니까? 하나님께 회개해야지. 수준이 불교보다 낮아요. ‘내가 져도 좋아요!’ 해야지. 살면서 우리가 남보다 더 이익을 얻어야지 하면 끝난 거에요. 이익을 못 얻을 수도 있죠. 개업식하는데 ‘사업 잘 되게 기도 좀 해주세요!’ 하는데 잘 안 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안 굶겨요! ‘승진하게 해 주세요!’ 그런 기도는 이방종교도 안 해요. 티벳가면 고승들도 그런 기도 안해요! 신앙은 그런 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이 필요합니다. 그게 팔복입니다. 신앙은 더 나은 의를 추구하고 소유하는 거에요. 그게 하나님의 법이에요. 그 법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거에요. 아브람의 놀라운 삶은 분명히 다른 차원이었어요. 이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은 후대들이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합당하게 완전히 변화돼야 합니다. 변화가 안 되면 만가지 은사를 받아도 무조건 지옥이에요! 하나님은 간단합니다. 변화되면 뜨고, 무거우면 가라앉는 거에요. 변화가 본질이지! 의식, 의례, 지식, 자기 믿음 아무소용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배마다 엄청난 증진을 매일 기대하면서 변화되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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