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12 | 창세기12장 : 믿음=순종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창세기12장 : 믿음=순종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0절까지)
창세기 12장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조금 난해한 구절들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익히 아는 말씀들일 것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드디어 주인공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과연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아직 이름이 안바뀌었어요. 아브람입니다. 나중에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 이 되죠. 우리가 하나님 만나서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옛날 이름이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우리의 영의 이름이 바뀝니다. 마치 야곱이 이스라엘로, 사래가 사라로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지금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직 ‘천국인’이라는 구원에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아브람은 70세 때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 안 바뀐 상태로, 아직 구원이 아닙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고향은 이 당시 하란이고 과거에는 갈데아 우르였죠. ‘친척과’ 친척은 형제 나홀이 있었고 나홀의 여덟 자녀가 있었고 또 하란의 두 딸과 아들이 있었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왜 아버지를 떠나라고 할까요? 데라가 원래 명령을 받았는데 불순종하여 하란에서 멈추고 다시 아브람이 명령을 받습니다. 원래 처음에 데라가 떠나라는 명령을 받아 순종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하란에서 멈춰버렸죠. 데라가 70세때 아브람을 낳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브라함이 75세때 하란에서 아버지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데 이것이 슬픈 사실입니다. 분명히 데라에게 가라고 했는데 안가니까 명령이 아브람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써요. 그게 우리한테는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우리가 거절하면 딴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요. 하나님은 아쉬울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 드디어 데라가 해야 할 임무를 아브람에게 넘기는 장면이에요.
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람이 지금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그 당시 가나안에 열 개 족속이 있었는데 다 부족들입니다. 아브람은 씨족이었는데 부족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또 가나안 문화 자체가 이미 매우 발달된 문화였습니다. 가나안 문화가 이미 수메르 문화만큼 받달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아브람이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내가 진짜 구원받은 자가 되면 진짜 영적으로 구원받은 자가 나에게서 나온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게 복입니다. 성경에서 복은 딱 한가지입니다. 근본적으로 복이라는 개념은 구원받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처복, 자식복, 장수복 하지만 아닙니다!복은 천국가는 복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람 편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이 나면 가족들이나 국가편이 되듯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 편이 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은 구원받는 자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똑같이 잘못을 해도 역시 구원자의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똑같이 잘못을 해도 우리편을 들어주셔서 우리에게 판전승을 주십니다.
4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랐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브람이 지금 하란을 떠난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이 전부에요.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겨요. 이게 마귀의 음성이냐, 하나님의 음성이냐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 음성은 하나님 밖에 낼 수 없는 걸, 우리 영이 알게돼 있어요. 그래서 쉬운 거에요. 하나님 음성은 정확히 하나님 음성이에요! 우리 영이란 게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음성이란걸 정확히 알게 돼 있어요. 만일 어떤 사람이 ‘헷갈린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인지 마귀인지 고민된다고 한다면 그건 마귀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람같지 않고 너무 선명합니다. 개는 개소리, 말은 말소리, 소는 소처럼 웁니다. 각각이 특질을 드러내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어가 있어요. 하나님의 음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간 겁니다.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은 하란의 아들이고 아브람 조카인데 롯만 동행하며, 데라가 남고 나홀과 여덟 자녀가 남고 하란의 두 딸이 남았습니다. 그때 당시 롯이 아브람을 따라 나오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할아버지, 아버지, 물론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 가족이 다 계셨기 때문에 롯이 아브람을 따라간 것은 제 생각에 친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합시다!’ 친하면 따라갑니다. 인생은 많은 경우에 ‘누구랑 친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납니다. 사실은 롯이 아브람을 따라갈 이유가 없어요! 딱 한가지 친했다는 이유로 따라나선 겁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 였더라’ 데라가 70세 때 아브람을 낳았죠. 데라가 드디어 가족을 이끌로 하란으로 갔죠. 하란에서 데라가 145세 때 하란에 있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다시 내려오는 거에요. 강을 따라가는 건 쉬운 일인데, 이건 육로로 오는 길이라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 사이에 레바논 산이 막고 있어서 지질학적으로 아주 오기 어려운 겁니다. 데라가 따라간 길은 순종이 쉬운 길인데 아브람이 온 길은 산악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아주 험난해요. 그런데 아브람이 말씀에 순종해서 그 길을 선택합니다.
5절입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이 ‘마침내’가 재밌습니다. 원칙적으로 글을 쓸 때 ‘가나안 땅으로 갔더라’ 이러면 되는 거에요. 이것은 성령님이 모세를 통해서 기록할 때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아브람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질 때, 우리는 말로는 쉽게 “순종하면 돼”라고 하지만, 아니에요! 쉽지 않아요! 쉬우면 다 해요. 순종 천국, 불순종 지옥인데 천국 다 갑니다. 순종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우리가 순종하려면 버릴 게 엄청 많아요. 탐욕 버려야지, 음란 버려야지, 미움 버려야지, 버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또 염려도 버려야지, 두려움 버려야지, 엄청 많아요. 이런 걸 다 버리기가 쉽습니까? 그러나 버리지 않으면 순종이 안됩니다. 하나라도 우리 마음 속에우상이 있으면 순종이 안됩니다. 그래서 순종이 어려운 겁니다. 지금 아브람이 드디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절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지금 많이 내려 왔어요. 세겜은 사마리아 지역의 남쪽 지역이고, 사마리아라는 지역의 수도에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어요. 남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죠. 그런데 이 세겜은 가나안 땅의 정가운데 지점이에요.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이 구절이 킹제임스버전에는 그냥 ‘세겜 땅 모레 평원’이라고만 기록돼 있어요. 세겜과 모레는 사람이름 이겠죠. 과거에는 사람 이름에서 지명이 나왔습니다.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세겜이 큰 도시였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타나!! 처음이에요. 아브람은 하나님을 듣기만 했는데 드디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성경은 참 재밌습니다. 아브람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말씀대로 살아왔겠죠. 실제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세겜 땅에 오니까 하나님이 처음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믿었는데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데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모세에게도 하나님이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것처럼, 하나님이 인생에게 나타나실 때 역시 우리는 그때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돼 있어요. 하나님 밖에 보일 수 없는 그 영적인 형태가 있어요. 그 하나님이 처음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났는데 아브람이 그것을 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나타나신 거에요.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지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가운데 있는 세겜이라는 도시를 주겠다고 한 것은 이 땅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을 모두 주겠다고 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거기가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7절입니다.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제단은 동물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놓는 단입니다. 제단은 평평한 돌 같은 걸로 만들어서 그 위에 동물을 얹어 통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배를 갈라서 태우는 속죄제나 화목제가 있죠. 그런데 아브람이 예배를 처음 드렸을까요? 아브람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으로 제물을 처음 드리는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지금 아브람이 처음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다시 말해 구원 안에 들어가면 그때 예배가 진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예배의 연습이에요. 저희 교회에 인터넷 예배가 있는데 거기선 하나님이 안 나타납니다. 이곳의 예배가 진짜 예배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장소가 있는데 아브람은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재 낙원에서, 천국에서 예배를 받으시고 동시에 이 땅에서의 우리의 지상예배를 받으십니다. 이 아브람의 예배를 받으셨기 때문에 지금 제단을 쌓았다는 표현이 있는 겁니다.
8절입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벧엘은 한 30킬로 밖에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요! 이곳은 나중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고, 아이는 여리고 전쟁 때 나오죠.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또 나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이 뭘까요? 여호와의 원래 원음은 자음으로된 ‘야파’라는 표현하기 어려운 말이에요. 여기에 모음이 들어가서 여호와, 야훼가 된 것인데 여호와는 한국식 표현이고, 자음으로 구성된 ‘야파’는 우리가 표현하기 어려운 말이에요. 아브람이 이렇게 부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란 말씀을 들은 것처럼 분명히 아브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 하고 부르듯이 아브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나타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히 들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람이 자녀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드디어 하나님을 부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와야만 기도가 응답이 되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 하나님께 안 들어오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잘 안받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만 하나님께 ‘비나이다’ 할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안 들으십니다. 대신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데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모든 것을 받으십니다. 계속 응답을 내려주시는데 이것이 자녀의 특권인 것입니다.
9절입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왜 아브람은 자꾸 이사를 갔을까요? 아브람은 농사꾼이 아니에요. 목축을 하니까 풀이 있는 곳으로 계속 이동하는 거에요. 남방으로 이동한 걸 보니까 아마 봄이었던 같습니다. 여름이면 북으로 이동할 텐데 말이죠. 벧엘에서 내려오는데 밑은 유다입니다.
10절입니다. ‘그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 아브람이 가나안땅에 들어왔으므로 잘 살아야 되는데,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아마 아브람은 내가 이렇게 어려운 길을 순종하며 왔고, 하나님께 예배생활 잘 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난 적도 있고,나 외엔 지금 지구상에 구원이 없는 상황인데, 기근이 오다니 ‘말이 안된다’는 식으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신데 ‘기근을 막지 못하시나?’ 하는 정신적인 쇼크상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잘못한 것도 없고, 죄도 안 지은 것 같은데 기근이 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기근이 와요.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애굽은 지금의 이집트에요. 가나안에서 애굽까지 걸으면 일주일 걸리고 최고속도로 걸으면 삼일 걸리는 보통 거리는 아닙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한 것은 불순종이 시작된 것입니다. 순종해오다가 불순종이 시작됐습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요. 하나님이 ‘땅을 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거기 살아야 하는 것은 명령사항이었어요. 그런데 아브람은 지금 ‘아니야 나 먹고 살아야 돼. 동물들이 다 죽어! 나 지금 신앙이고 뭐고 필요없어!’하는 마음으로 불순종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애굽은 영적으로 불신의 땅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애굽에서 안 나왔으면 100% 지옥갔을 겁니다. 하나님의 공식은 자기에게 순종할 때만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무조건 버립니다. 지금 아브람에게 위기가 오니까 불순종을 선택합니다.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절입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아브람이 지금 인간적인 속셈이 들어갑니다. 자! 이제 밥은 먹고 살게 됐는데 부인을 뺏기게 생겼어요. 부인은 원래 이복동생이었는데 아름다우니까 목숨을 잃을까봐 수를 씁니다. 아브람은 원래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그깟 기근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믿음을 버린 겁니다. 그리고 생존의 위협 때문에 자기 아내까지 범죄자로 몰고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요합니다. 내가 범죄하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엄마 믿음 떨어지면 자녀가 다 지옥가요! 아빠 믿음 떨어지면 자녀가 지옥갑니다! 나 하나가 잘못되면 통째로 가는 거에요. 지금 아브람 한명 때문에 부인도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12절입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절립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이것은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브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온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브람의 말처럼 실제 누이지만 문제는 아브람의 맘속에 두려움이 왔습니다. 가난에 대한 두려움, 부인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은 믿음을 잃어버렸을 때 오는 현상입니다. 제가 오늘 애터미 같은 다단계 하는 교회들은 다 지옥간다고 컬럼 썼죠. 그 원리가 뭔지 아세요? 그건 죄가 아니에요, 좋은 방법이에요. 왜? 지옥가느냐?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옵니다. 사람에게는 먹고 사는 두려움이 엄청 커요. 또 가족에 대한 두려움, 내가 못벌면 가족이 다 굶어죽는데 하는 두려움이 와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일 때는 두려움이 없는데 관계가 끊어지면 두려움이 옵니다. 교회에서 ‘애터미’ 같은 거 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에요.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먹고 사는 두려움 때문에 하는거에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운 상황 중에도 두려움이 없는 것, 그것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신앙은 누구나 두려워해야 할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게 신앙이에요. 그런데 아브람은 지금 겁이 나고 염려가 들고 부인 잃어버릴까봐 두려워 범죄 아닌 범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지금 누가 아리따운 것 봤다고 얘기했습니까? 아무도 얘기 안 했는데 아브람 혼자서 심중에 경계심을 품고 있어요. 아무도 자기 부인 이쁘다고 얘기 안했는데 아브람이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구절 같습니다. 지금 아브람은 사는게 사는게 아닙니다. 믿음을 찾아서 나온 아브람인데 지금은 모든게 불안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마음이 온통 불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늘 불안해서 앉은 자리가 평탄치가 않아요. 앉아도 불안하고 무슨 말을 들어도 왜 저런 말을 하나싶고, 신경쓰입니다. 우리가 평안 가운데 있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은혜로 받아들이는데 불안하면 오버하고 신경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떠나고 불순종하면 불안합니다. 평안이 깨어지고 두려움이 오고 불안한 겁니다.
15절입니다.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인지라’ 드디어 부인을 뺏깁니다. 바로는 이집트의 왕입니다. 이름이 아니고 왕이라는 뜻이에요. 그 당시의 왕은 그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왕에게 속한 것입니다. 가나안은 부족연맹이고 애굽은 왕권국가인데 왕의 명령이 지상명령이에요. 그래서 바로왕이 오라하면 올 수 밖에 없어요. 아브람은 처음에 기근 때문에 왔는데 드디어 부인을 뺏기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지금 부인이 후궁이 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아브람은 굉장히 긴장된 상태입니다.
16절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 일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바로가 지금 부인에 대한 댓가를 준 것입니다. 아브람은 각종 물질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잃은 것입니다. 물질을 얻고 영혼을 잃는 것, 이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에서 이탈될 때 100% 물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해봤는데 돈을 버는 경우가 두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가지고 복음전파를 할 때 복음전파의 필요를 위해 물질을 주십니다. 두 번째, 믿음을 버릴 때 돈이 들어와요. 항상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 증명할 것입니다. 구원이 상실될 때 돈이 들어오는데, 자기 부인을 판 것은 쉽게 말해 영혼을 판 것입니다. 영혼을 팔 면 돈이 들어옵니다. 바로는 마귀가 다스리는 사람이에요. 마귀의 다스리는 사람 바로왕은 궁에 물질이 풍성합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많은 물질을 쥐고 있어요. 그래서 마귀는 우리가 구원을 팔아버릴 때 돈을 줍니다. 이때 사람들은 ‘여호와 이레’ 하고 말합니다. 개똥입니다. ‘여호와 이레’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 주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과 희락을 주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을 오해해서 ‘여호와 이레’에 갖다 붙이는데 거짓말입니다. 만약에 아브람이 기근이 왔을 때 애굽으로 안내려 가고 가나안 땅에 거했다면 하나님은 아브람이 어떻게 견디는가를 보시다가 하나님이 알아서 물질을 베풀어 주셨을 것입니다. 이게 진짜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오는 복이 여호와 이레이지 지금처럼 자기 부인의 영혼을 팔아버린 다음에 오는 물복은 ‘여호와 이레’가 아니라 구원상실을 통한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물복을 주관하지 않아요. 그게 어려운 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분이시지만 물복을 주장하지 않아요. 그런면 왜 바울은 죽을 때까지 고생하면서 살았습니까? 물질세계와 신앙은 별개입니다. 물질이 많으면 100% 타락합니다. 그 예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20년 동안 믿음충만한 사람이었는데 번성하고 부자가 되니까 타락했어요. 후에 회복되지만, 그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아시기 때문에 물질을 주실 때 조심스러워 하세요! 그래서 물질의 복을 좋아하는 게 사탄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월세 살다가 전세 얻고 아파트 사고 크게 넓혀가면 부러워하는데 좋은 거 아닙니다. 왜냐면 사람은 일단 수중에 돈이 좀 들어오면 일단 기도가 안됩니다. 기도 안 되는 거가 뭐가 좋아요?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인데 우리는 복권당첨을 바랍니다. 지옥갑니다! 또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목사님께 기도 부탁하는데 사업은 잘되도 못되도 괜찮습니다! 본질은 육의 복이 아니라 영의 복입니다. 야곱의 축복 노래도 있는데 그건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못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게 복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 보는 즐거움이 1이라고 할 때, 함께 가는 사람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10입니다. 경험하셨겠지만 여행할 때 동행하는 자가 참 중요해요. 하지만 하나님은 100만큼의 기쁨을 주세요. 환경은 1, 사람은 10 밖에 즐거움을 못줘요. 그러므로 진짜가 뭐냐? 하나님이 복이에요. 아브람이 지금 돈 때문에 다 잃어버렸어요. 나중에 물질은 얻게 되는데 자기 부인 팔아버리고 얻은 돈은 자랑할 게 아니에요. 우리는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 물질 얻었다고 하는데 이건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자기 부인을 팔아버려 후궁되면 지옥갑니다! 원래 아브람, 사래, 롯은 구원받은 자에요. 근데 후궁이 되면 지옥입니다! 아브람이 큰 위기를 맞은 겁니다!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사인을 보내십니다. 비록 바로는 불신자이고 이방의 왕이지만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국가가 왜 못사느냐? 우리나라는 앞으로 잘 살기 힘들어요! 믿는 자가 많아질 때 이 세상에 있는 국가가 잘되는 게 원리에요. 그런데 대한민국에 신자가 구원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국가에 재앙을 줘요. 이것도 역사가 증명한 사실입니다. 이집트가 왕성했는데 후궁 한명 데려왔더니 그 후로 되는 게 없어요. 그러니 바로가 고민했겠죠. 구원상실에 따른 하나님의 보복입니다. 국가가 잘 되려면 딴 거 없어요! 구원받는 자가 늘면 잘되게 돼 있어요. 중국이 구원받는 자가 늘어나니까 한 때 잘됐죠. 믿는 자가 많을 때는 항상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주하는 백성 때문에 이방 국가들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대한민국이 어려운 것은 기독교가 쇠퇴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18절입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행하였느냐’ 재앙이 임하니까 바로가 갑자기 정신 차린 겁니다. 이유도 없는데 재앙이 임하니 바로가 억울에서 뒤를 통해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죄를 지으면 뭐가 잘못됐는지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드디어 바로가 아내였던 것을 알았습니다. 남의 아내면 간통이며 불륜입니다. 바로왕이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 목사보다 더 깨끗한 사람입니다. 바로 왕이 간통죄를 무서워합니다. 재앙이 오니 정신차린 겁니다.
19절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게 데려가라 하고’ 아브람이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분명히 잘못해서 아내를 팔았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엄한 이방인에게 폭탄을 터뜨리고 그를 구출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왜 구출하셨을까요? 의문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때 일방적으로 우리를 잘 구출 안 하십니다. 근데 여기서는 아브람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끝나면 역사적으로 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각오하고 역사하신 것이지, 지금 시대에 만약에 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냅두십니다. 우리는 구원상실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상실은 모든 재앙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는 구원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다 잃어버려도 구원은 잃어버리면 안돼요. 그러면 이것 때문에 모든 것이 회복돼요. 반대로 구원을 잃으면 빠르면 3년, 늦으면 20년 안에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데 이때 구원이 안 이루어지면 나중에 갑자기 망합니다. 단명으로 망하고 갑자기 풍지박산으로 망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방법은 우리 생각과 달리 갑자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자리에 있을 때 이걸 놓치면 안돼요. 구원을 잃어버리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를 이제 아브람이 깨닫게 됩니다. 구원은 언제든지 꼭 지켜야 돼요!
20절입니다.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지금 모든 소유물이 오고 다시 아브람이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아브람이 물질을 얻어서오지만 마음은 찜찜합니다. 비록 물질의 복은 받았지만 실수한 것 때문에 속은 찜찜합니다. 우리가 육적인 형통함에 취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본론이 한가지에요. 오직 영 밖에 없어야 돼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전부가 돼야 합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오셔서 절대적으로 말하실 때가 있어요. 믿음은 절대성에 근거합니다. “너 술먹으면 안돼” 할 때 “술 먹어도 돼” 하는 것은 절대성이 없는 겁니다. 천국은 절대적인 말에 대한 나의 순종으로 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뭘 시켰을 때 안하면 다음에는 기회를 안 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은 그럽니다. “그래 못했지, 다음에 해”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많이 안 주세요. 왜 지옥가느냐? 많이 기회를 줬어. 거듭남을 주고 성령세례를 주고 마귀 시험을 이길 힘을 줬어. 근데 구원을 안이루었기 때문에 지옥가는 거에요. 우리가 절대자를 만나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만날 때 믿음이 시작된다” 믿음은 절대성이 필요해요. 여러분! 그걸 아셔야 합니다. 믿음은 절대적인 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이래야만 돼!’ 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이 왜 믿음의 조상이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 가나안 땅에 가야한다!’ 하셨을 때, 아브람은 이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했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알고 있는 옳은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너! 이거 끊어야 돼!’ 절대적입니다. ‘너! 이거 바쳐야 돼’ 절대적입니다. ‘너! 이거 해야 돼!’ 절대적이에요. 만약에 하나님에게 절대성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다면 그냥 관념입니다. ‘너! 이게 좋은 거야!’ 이것은 철학입니다. 일반 종교들이고 윤리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에 절대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렵습니다. ‘너! 여기 와야 해! 이거 해야 해!’ 4복음교회 왜 합니까? 아주 간단해요. 사실은 전 하기 싫었어요. 근데 하나님은 절대적이에요. 해야되는 거에요. 하라면 하는 거에요. 상황을 얘기하는 건 믿음 아니에요. 내가 굶어 죽어도, 모든 걸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절대성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 아브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왜? 아브람이냐? 아브람이 절대권자를 만난 겁니다. 그게 다른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요? 데라는 순종하다가 말잖아요. 절대권자를 못만나서! 절대권자를 만나면 그때부터 신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 전에는요? 신앙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많이 안 주세요. 왜 지옥가느냐? 많이 기회를 줬어. 거듭남을 주고 성령세례를 주고 마귀 시험을 이길 힘을 줬어. 근데 구원을 안이루었기 때문에 지옥가는 거에요. 우리가 절대자를 만나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만날 때 믿음이 시작된다” 믿음은 절대성이 필요해요. 여러분! 그걸 아셔야 합니다. 믿음은 절대적인 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이래야만 돼!’ 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이 왜 믿음의 조상이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 가나안 땅에 가야한다!’ 하셨을 때, 아브람은 이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했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알고 있는 옳은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너! 이거 끊어야 돼!’ 절대적입니다. ‘너! 이거 바쳐야 돼’ 절대적입니다. ‘너! 이거 해야 돼!’ 절대적이에요. 만약에 하나님에게 절대성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다면 그냥 관념입니다. ‘너! 이게 좋은 거야!’ 이것은 철학입니다. 일반 종교들이고 윤리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에 절대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렵습니다. ‘너! 여기 와야 해! 이거 해야 해!’ 4복음교회 왜 합니까? 아주 간단해요. 사실은 전 하기 싫었어요. 근데 하나님은 절대적이에요. 해야되는 거에요. 하라면 하는 거에요. 상황을 얘기하는 건 믿음 아니에요. 내가 굶어 죽어도, 모든 걸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절대성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 아브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왜? 아브람이냐? 아브람이 절대권자를 만난 겁니다. 그게 다른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요? 데라는 순종하다가 말잖아요. 절대권자를 못만나서! 절대권자를 만나면 그때부터 신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 전에는요? 신앙아닙니다!
신앙아니고 종교문화생활 하는 겁니다. 찬양드리고, 기도 좀 하고, 말씀 좀 보고 그런 건 기독교 문화생활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쉬운 거 안 시키십니다. 어려운 거 시켜요! 하기 싫은 거 시킵니다! 하라는 거에요! 그리고 해야 됩니다! 이게 순종입니다. 순종은 내가 좋은 걸 하는 게 아니고 하라는 걸 하는 겁니다. 이런절대성에 대한 순종이 믿음이며 이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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