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SIS 8 | 창세기8장 : 지구재창조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GENESIS 8
창세기8장 : 지구재창조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2절까지)
창세기 8장 말씀 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들어간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이 기억하실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홍수가 났는데, 바람으로 말리는 것으로 없애는 것은 아니지요. 어느 정도 수증기가 되어서 올라가긴 올라 가겠지요. 바람이 많이 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각 변동을 상징합니다.
2절 입니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며’ 언제일까요? 40일 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6백세되던 해에 2월 17일 날에 비가 내렸고 40일 동안 퍼붓다가 땅에 있는 지하수가 멈춰지고 하늘의 비가 멈춘 것입니다.
3절 입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150일 후에 줄어들고’ 지구를 완전히 덮었지요. 덮었다가 이제 그 덮은 물이 드디어 점차 줄어드는 것입니다.
4절 입니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 이레 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7월 17일 입니다. 2월 17일날 쏟아지고 40일간 쏟아진 다음에 40일 후에 비가 멈추고 그 다음에 7월 17일 150일 입니다. 그런데 재미 있습니다. 7월 17일은 이것은 태양력이 아니고, 태음력 입니다. 노아 때는 지금처럼 태양력이 아닙니다. 지금은 2월 달이 28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 당시는 수면층이 있었고, 지구가 똑바로 있었기 때문에 계절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달로써 평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달이 30일 입니다. 150일 인데, 분명히 7월 17일은 한 달을 30일로 계산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그 당시 달을 통해서 오는 음력으로 사람들이 날짜를 계산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라랏 산이’ 아라랏 산은 지금 터키에 있습니다. 배가 멈추려면 산의 정상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중턱 어디쯤에 있었을 것입니다. 배가 크기 때문에 머물 정도가 되려면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높은 곳은 뾰족하기 때문에 중턱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절 입니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루 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10월 1일 입니다. 우리 한자 표현의 초 하루, 그러니까 10월 1일 날 드디어 산들의 봉우리가 물 위에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물이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6절 입니다. ‘40일이 지나서‘ 10월 1일날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고 40일 지난 11월 10일날, ‘노아가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방주뚜껑이, 뚜껑 바로 밑에 창문을 냈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 창문을 연 것입니다.
7절 입니다. ‘까마귀를 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까마귀가 날아서 왕래한다?’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왜 들어오지 않을까요? 먹을 것이 있다는 얘기 입니다. 무엇을 먹었을까요? 분명히 까마귀는 시체를 먹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먹을 것이 없으면 살던 곳에 배고프니까 들어오겠지요. 그러니까 까마귀는 분명히 시체를 먹었다고 생각 합니다. 다시 말하면 까마귀는 옛날에도 육식이라 생각 합니다. 원래 모든 새들은 다 잡식 입니다. 그런데 뿌리가 무엇이냐? 까마귀는 육식일 확률이 큽니다. 또 한 가지는 ‘왕래하였다는’ 까마귀는 멀리 가지 않고 주변을 맴 돌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까마귀가 좀 두려웠나 봅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위협 당할까봐 주변을 맴돕니다. 모든 새들은 자기가 먹고 있던 곳에서 겁이 많기 때문에 한꺼번에 멀리 떠나지 않습니다. 먹이가 확보되어야 갑니다. 두 번째로 까마귀가 주변에 맴돌았다는 것은 멀리까지 먹이가 분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시체가 드문 드문 있다것을 말합니다.
8절 입니다. ‘그가 또 비둘기를 내 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또 비둘기를 내놓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물이 줄어들었나 아는 것입니다.
9절 입니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에 돌아와’ 왜 돌아왔을까요? 뻔합니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때는 초식인 것입니다. 만약 육식이면 까마귀처럼 육식을 먹을 것인데 초식이니까 먹을 것이 없어 돌아온 것입니다.
10절 입니다. ‘또 7일을 기다려’ 그런데 참 이상해요. 노아가 행동 할 때마다 7일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볼 때는 아마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이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반복성이 있는데, 노아의 행동은 이제까지 다 7입니다. 하나님도 7일 만에 문을 닫으시고 7일 만에 또 보냈다! 이런 것이겠지요. 월요일 날 까마귀 보낸 다음에 일주일 보내고 월요일 날 또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7일은 분명히 노아가 성수 주일 했다고 봅니다. 그 당시에도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물론 안식일이 모세 때부터 왔지만 분명히 안식일을 지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노아의 행동 패턴은 계속 7일 입니다. 그리고 날짜는 태음력 30일이었구요. 7일 후에 ‘7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 놓으매’
11절 입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져왔습니다. 뭘까요? 쉽게 말하면 비둘기가 먹기에는 아직 조금은 애매한 것입니다. 동물들은 먹기에 애매하면 가져옵니다. 동물들은 애매하면 먹을까 말까 하다가 먹을 때 까지는 옆에 둡니다. 그러니까 비둘기가 초식인데다가, 비둘기가 애매하니까 잎사귀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습니다. 감람나무 잎은 나무가 있다는 것이고, 나뭇가지가 보인 것은 물이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12절 입니다. ‘또 7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또 성수주일 하고 7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또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아요. 뭡니까? 비둘기가 먹을 것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에 잠겼어도 식물은 많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홍수 심판으로 죽은 것은 ‘기는 것’과 ‘나는 것’과 그리고 ‘동물’은 죽었는데 식물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식물의 열매와 잎사귀를 먹었겠지요.
13절 입니다. ‘601년 첫 째 달’ 육백 일년 누구 나이입니까? 노아 나이 입니다. 처음에 홍수는 600세 2월 17일날 되었고, 601년 1월 초하루 곧 1일 입니다. ‘1월 1일에 땅 위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처음에는 까마귀를 내보내고 비둘기 내보내고 이제는 방주 뚜껑입니다. 뚜껑을 왜 열지 못했을까요? 겁이 났겠지요. 노아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아니 세상에 지구 위에 자기만 살아 있습니다. 식구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마 노아와 식구들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죽을까봐 조심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린 믿음으로 살아야 해! 믿음으로 살면 돼! 걱정 할 것 없어!” 아닙니다. 조심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 그런곳에 선교 나가도 돼! 하나님이 도와 주셔!” 그리고 뭐합니까? 순교 당합니다. 아니 그 남은 시간에 영혼을 전도해야 하는데, ‘믿음으로 하는 것이야’ 하고 그냥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오히려 지혜롭게 합당하게 머리를 써야 하는데, 노아가 지금 머리가 좋은 것 같습니다. 만약 저 같으면 ‘난 믿음으로 해! 야! 나가자!’ 했을텐데! 노아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갈 때에 우리에게 있는 지혜나 일반 은총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특별 은총이 강해서 “하나님! 제게 말씀해 주세요!” ‘음! 계시가 임했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반 은총인 의사도 주셨고 법관도 주셨고, 정치가도 주셨고, 다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반 은총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일반은총에 밝으면 좋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일반 은총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노아는 제가 볼 때에, 꼼꼼한 사람 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날짜를 다 적었다는 얘기 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특별 은총도 강하지만 일반 은총 쪽으로 굉장히 꼼꼼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 합니다.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라’
14절 입니다. ‘둘째 달 스므이레 날에 땅이 말랐더라’ 2월 27일 입니다. 자! 홍수 시작은 600세 2월 14일 이구요!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홍수 끝나고는 2월 27일 입니다. 기간은 1년 10일 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음력 입니다. 양력은 1년 입니다. 태음력 한달이 29.5일 입니다. 아직 양력은 없지만, 양력 계산할 때, 이것은 1년 입니다. 현재 노아가 1년이란 기간 동안, 계속 배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태양력으로 1년 입니다. 365일이 양력 입니다. 그리고 음력으로는 354일 입니다. 거의 10일 차이가 나는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에 돌입되어야 하는데, 회개의 세례는 씻는 것인데, 베드로후서 말씀에 베드로가 ‘그 물’을 ‘노아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에 이르느냐?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세례가 무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세례 입니까? 아닙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중요합니다. 1년 이상 걸립니다. 이것이 진짜 세례 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세례란 본질이 무엇이냐? 목회자가 형식적으로 주는 것이 세례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적어도 1년 이상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온통 물에 잠겼지만 드디어 산 봉우리가 보이고 드디어 나무들이 보이고 점점 새로운 세계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구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 맘이 변화되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지구의 재창조’ 입니다. 지구만 다시 창조되는데 그 동안 물이 깊어져서 바닥이 깊어지고 산이 올라갑니다. 지축이 23.5도나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수면층이 다 파괴되고 사라집니다. 그리고 많은 지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은 노아와 그 식구들의 내면세계 입니다. 많은 분들이 수련회 가서 은혜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한 것 가지고 1년 이상을 하나님 앞에 회개 합니다. 우리 같으면 한 번 뜨겁게 회개해서 ‘하나님 앞에 나! 용서 받았어!’ NO! 아닙니다. 하나 가지고 1년 이상 회개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세례 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아야 천국에 들어가는데, 이 노아에게 1년이라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데스바냐에 들어가는데 1년 걸립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쉽게 안 일어납니다.구원은 어떤 기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기간을 통과하면서 노아처럼 내면의 세계가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바뀌는, 내면 세계의 변화가 빨라야 1년 걸린다는 것입니다. 노아와 식구들이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것입니다.
15절 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절 입니다. ‘너는 네 아내와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드디어 8명이 다 생존했습니다. 우리가 볼때는 그럴 것입니다. ‘당연히 살지!’ 그렇지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처음으로 지어진 배이고 노아의 직업이 목수도 아닙니다. 예측이 안됩니다. 홍수가 났는데 이들이 생존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이란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생존해 나가야 하는데, 이 생존이 쉽지 않습니다. 제 이론을 말씀을 드립니다. 100명이 거듭나면 1명이 구원 받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회개가 되지 않아서 중간에 다 이탈되어 버립니다.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면 우리 마음이 새로워 지고, 우리가 죄에서 벗어납니다. 죄를 지었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말을 하지요. ‘목사님도 한 번은 실수를 하지요!’ 아닙니다. 실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코올을 입에 댄 적이 없는 사람은 알코올 때문에 고통당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죄에 대해서 다시는 오염되지 않습니다. 왜? 바뀌었으니까요! 지금 노아의 8식구는 기가 막히게 다 보존되었습니다. 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17절 입니다. ‘너는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리라 하시매’ 자 지금 식구들이 모두 나온 다음에 이제 동물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선 사람이 우선이고, 동물이 두 번째 입니다.
18절 입니다. ‘노아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절 입니다. ‘땅 위에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드디어 동물들이 다 나옵니다. 동물들이 1년 동안 그 안에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충분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혜를 주셔서 모두에게 먹을 것을 제공 했을 것입니다. 1년 먹을 것은 굉장한 양입니다. 보통의 양이 아닙니다. 1년이란 기간은 그들이 새로운 세계에 도달될 때까지 경험해야 할 우리의 영적인 변화의 기간 입니다. 동물들에게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0절 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드디어 예배가 나옵니다. 어떤 예배입니까?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모세에게 말씀하신 제사 법은 사실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제사법을 알려 주셨지요. 그리고 이 제사법이 전수 됩니다. 전수 되어오다가, 모세 때 ‘번제와 소제와 속건제와 속죄제와 화목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제사의 기본은 번제 입니다. 번제는 통째로 태우는 것입니다. 통째로 태우는 번제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워지는 이유가 뭐지요? 지옥에 왜 들어가느냐? 살면서 자아가 죄가 태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한 불에 가는 것입니다. 땅에 살면서 내 자아가 태워지면 지옥갈 일이 없습니다. 왜? 난 이미 태워졌기 때문입니다. 태워진 사람은 태울 일이 없습니다. 지옥은 게엔나 ‘쓰레기장’ 입니다. 제사란, 예배란 무엇이냐? 예배는 종교적인 일이 아니라, 예배는 내가 하나님 앞에 태워지고, 자아가 죽는 ‘영적인 산제사’ 입니다. ‘산 제사’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죽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죽고, 내 생각이 죽는 것입니다. 내 기준이 죽고, 내 성격이 죽고, 다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것, 그것이 예배 입니다. 그렇게 태워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흠향 하십니다. 내 자아가 부서지고 태워지는 것, 내 육신의 소욕이 죽어지는 것, 이것이 예배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예배를 받으셨다는 것은 노아의 자아가 1년 동안 죽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죄가 씻겨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노아가 변화 되었습니다. 노아가 변화도 없이 하나님께 나아왔으면 예배가 상달되지 않았을 거십니다.
21절 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향기를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아니? 동물태우는 냄새가 향기로울까요? 역겨운 냄새이지요. 악취가 나지요. 그런데 우리가 죄를 사함받으면 하나님 앞에 향내가 납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다시 말하면 지구의 저주가 어디서 왔습니까? 인간의 죄악에서 왔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날 때부터 죄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아담부터 노아 때까지 계속 죄성이 강해 집니다. 지금은 어떤 시대입니까? 애기 때부터 악합니다. 지금은 아주 불순종이 체질화 되어 있습니다. 지금 10대 하고 지금 60대 하고는 사고방식이 하늘과 땅입니다. 10대 들은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요즘 범죄들은 극악무도한 범죄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천국에 못들어가는 것은 종교심의 결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옛날부터 아주 많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그 안에 악이 많아서 구원이 어려운 것입니다. 종교는 늘지만 구원은 없는 것, 이것이 말세 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핸드폰을 접하고 tv를 접하고 그 속에서 음란과 폭력을 배우고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에 가면 욕부터 배웁니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부터 배웁니다. 지금은 또 부모님에게 대듭니다. 이유는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전조 증상 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의로워야 받는데 악에 물들어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내가 죄가 벗겨져야 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본론인데, 은사 방언, 예언, 영 분별, 통변, 신유, 현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옥갑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이런 은사나 계시들은 회개가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본론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노아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심 하시는데 다시는 이런 것을 반복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노아 한 명의 예배를 받은 것처럼 지금도 십자가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아진 바가 된 것입니다. 속죄라고 하지요. 참된 예배인 십자가 예배로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22절 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지구가 있을 동안에는 심고 거둡니다. ‘추위와 더위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낮과 밤이 쉬지 않으리라’ 드디어 지금과 같은 현재의 모습, 현재의 지구가 어디서 왔느냐? 노아의 홍수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태양력이 생깁니다. 마치겠습니다.
| 해설 : 사복음교회 박경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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